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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껏 법을 외워 사존께서 주신 ‘전법륜’을 소중히 여깁시다

글/ 매영(梅影)

【정견망】

나는 매일 ‘전법륜’을 외우는 형식으로 법(法)을 공부한 후 수련에서 아주 큰 제고가 있었다. 매번 문제에 봉착할 때마다 ‘전법륜’을 외우는 과정에서 늘 법의 지도를 얻을 수 있었다. 난(難) 속에서도 제때에 자신에게 존재하는 문제를 찾아낼 수 있었고, 복잡한 수련 환경과 형세에 직면해 근본을 파악해 마음이 어지럽지 않을 수 있었으며, 안정적으로 정법수련의 길을 걸을 수 있었음을 느낀다.

내가 대법(大法)을 수련한 25년을 돌아보면 ‘전법륜’을 외우기 시작한 것은 불과 10년이 못 된다. 2005년에 시험 삼아 ‘전법륜’을 외워본 적이 있었는데, 당시 ‘전법륜’을 외울 때 아랫배에서 파룬(法輪)이 강렬하게 회전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 힘은 아주 강대해서 발정념을 할 때 솟구치는 힘이 얼굴 근육과 입마저 끌어올릴 정도였는데 발정념의 힘이 비할 바 없이 거대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당시에는 사람마음이 무겁고 법을 외우는 게 너무 느리다는 생각이 들었다. 반나절에 겨우 2~3페이지를 외웠는데, 통독하면 2강을 읽을 수 있었다. 속인 사유로 “수지가 맞지 않는다”며 이해득실을 계산했기 때문에 수박겉핥기로 중단하고 견지하지 못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후회스럽다.

이번에 ‘전법륜’을 외울 때도 또 다시 전과 마찬가지로 강대한 힘을 느낄 수 있었다. 지금 나는 사부님께서 나를 가지해주신 것의 소중함을 알기에 법을 외우는 과정이 아무리 힘들어도 꾸준히 견지하고 있다.

처음에는 한 단락을 두세 부분으로 나눠 외웠다. 몇 년이 지난 후에는 한 단락씩 외울 수 있었다. 이렇게 ‘전법륜’을 한 번 다 외우는데 3개월이 넘는 시간이 걸렸다. 매 한 글자, 매 한 구절의 함의와 문자의 표면적인 의미까지 세심하게 이해하고 기억했으며, 절대 법을 외우기 위해 외우지 않았고 속도나 수량을 추구하지 않았다. 나는 빨리 외우려고 하면 이 역시 쉬운 것을 발견했는데, 필경 ‘전법륜’을 천백 번 읽었고 또 몇 년간 외웠기 때문이다. 때로는 머리로 생각하지 않아도 익숙하게 글자나 구절을 말해낼 수 있는데 그것도 아주 유창하게 할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은 법을 외우는 갈림길로 잘못 들어간 것이다. 나는 절대 이런 식으로 법을 외우는 것을 허락할 수 없었다.

지금은 매번 ‘전법륜’을 외울 때 글자마다 구절마다 내게 모두 신선하고 마음에 와닿는다. 법(法) 속의 같은 내용이 서로 다른 각도에서 표현의 변화가 있고 단어나 구절의 내재적인 연계 등에 대해서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무의식중에 단번에 문자 표면 배후의 그런 방대한 내포를 접촉할 수 있었는데, 다른 공간장에서 느끼는 정보량은 대단히 커서, 한 단락의 법이라도 반드시 여러 번 반복해서 외우고 반복해서 이해해야만 저쪽 장(場) 속에서 비로소 소화하고 흡수할 수 있었다.

동시에 법을 외우는 과정은 또한 내 공간장 속의 그런 완고하고 좋지 않은 물질들을 청리(淸理)하고 해체하는 것이었다. 겉으로는 마치 ‘적(的)’을 한 번 더 외우고 ‘료(了)’를 한 번 덜 외거나, 또는 늘 어떤 구절을 빼먹거나, 또는 ‘이것(這)’을 ‘저것(那)’으로 읽거나, 또는 전에 외운 것과 이번에 외운 단락에서 유사한 글자를 혼동하는 등인데, 일일이 시정해서 최후에 정확한 글자와 구절로 바로잡는 과정은 다른 공간에서는 실질적으로 자신의 좋지 않은 물질을 청리하는 것이자 그쪽에서 자신을 바로잡는 과정이었다. 때문에 천천히 외우는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또한 그것은 자신의 착실한 수련 및 정법수련과 세 가지 일을 잘하며 생활 속에서 안으로 찾고 조금씩 심성을 수련하는 것과 연계되어 동시에 추진되는 것으로, 일종의 정체제고(整體提高) 과정이었다. 겉으로 보면 몇 달에 ‘전법륜’을 한 번 외웠을 뿐이지만, 이 몇 달 속에서 늘 법이 자신의 착실한 수련을 지도하는 깊은 감수가 있었다. 이 한 번은 단순히 ‘전법륜’을 외웠을 뿐만 아니라, 한 번 외우기 전과 후의 나는 완전히 서로 다른 경지 속에 있었다.

‘전법륜’을 외우기 시작한 후, 수련 중에 장기간 해결하지 못했던 문제들을 나도 모르는 사이에 가장 좋은 해결 방법을 찾아낼 수 있었다. 나는 이것이 대법이 내게 점화해준 것임을 잘 안다. 왜냐하면 그것은 일종 갑자기 찾아온 직관이나 지혜로 내가 머리를 써서 힘들게 생각하거나 또는 사람의 총명함으로 얻어온 게 아니기 때문이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겠다. 밍후이왕에서 어떤 수련생이 일사일념(一思一念)을 닦는 것을 교류한 문장을 보고 나 역시 엄격하게 자신을 요구했다. 그러나 여러 차례 시도해봤지만 결국 염두가 순식간에 너무나 다양하게 변화하기에 근본을 잡아내지 못하는 것을 발견했을 뿐이다. ‘전법륜’을 외우는 중에 때로 잡념의 교란이 있었는데, 어느 날 머릿속에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이 잡념들을 기록해서 그것을 깨끗이 제거하자!’ 나는 노트와 펜을 옆에 두고 법을 외울 때 어떤 한 가지 잡념이 나타나기만 하면 곧장 그것을 기록하고 또 번호를 매겼다. 다음은 내가 초기에 기록했던 한 페이지다.

오늘 〈업력의 전화〉란 절을 외우면서 다음과 같은 잡념이 떠올랐다.

1. 오늘 저녁에 닭고기 요리를 하는데, 건물 아래 야채 가게에 밤을 팔까?

2. 내가 새로 출간된 책 한 권을 옥(玉)에게 보내려 하는데 대법자료가 담긴 마이크로 SD카드를 책 속에 넣어서 택배로 보내면 검열을 통과할 수 있을 거야.

3. 치마가 낡았으니 수선해야만 입을 수 있겠어.

4. 부레옥잠 꽃이 아주 예쁘다.

이 잡념들을 기록한 후 잡념이 곧 줄거나 없어지기 시작했고, 나중에는 한 시간 법을 외우는데 아주 깊이 들어와 잡념이 없었다. 보아하니 이런 것들이 폭로되는 걸 두려워하는 것 같아서 그것을 기록하고 분석하고 폭로하고 없앴다!

x월 x일 기록하다

이렇게 기록하는 방식에 따라 며칠을 기록하자 잡념이 줄어들어 담담해지기 시작했다. 아울러 문득 평소 생활 속에서도 잡념을 잡아낼 수 있는 능력이 생긴 것을 발견했다. 내가 전에 ‘개성’이나 자기 ‘생명의 특징’이라고 여겨왔거나 또는 ‘습관’이란 외투를 걸친 근본 집착이 반복적으로 각기 다른 모습으로 생활이나 사유방식 속에 나타나도 그것을 붙잡아 깨끗이 제거하기는 아주 어려웠다. 늘, 그것에 따라 생각하면서 반나절이 지나도 알아차리지 못했는데, 지금은 비교적 민감하게 그것을 발견하고 사로잡을 수 있다.

특히 부면(負面)적인 사유와 같은 것들이 다른 공간에서 이미 화강암처럼 완고한 물질로 형성되었는데, 지금은 제때 그것을 가로막고 배척하고 청리할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바뀌기 힘든 본성’의 근본 집착이 느슨해지기 시작했다. 비록 그것의 뿌리를 제거하는 것과는 여전히 어느 정도 거리가 있지만, 나는 이미 법을 외우는 가운데서 그것을 깨끗이 제거하는 방법과 능력을 얻었다. 남과 모순이 발생할 때면 안으로 찾았고, 남과 모순이 발생하지 않는 일상생활 속에서도 문제를 발견하고 안으로 자신을 잘 찾을 수 있었는데, 이 방법이 정말 좋았다!

이외에 또 한 가지 일을 말하자면, 전에 사악(邪惡)에게 두 차례 납치된 적이 있다. 비록 정념으로 검은 소굴을 탈출하긴 했지만 그 이후 사악의 중점적인 감시 대상이 되었다. 소구(小區 커뮤니티)의 물류관리자가 사악에게 이용당해 나를 감시하는 제1선이 되었다. 내가 문을 나서면 그들이 외부 감시인에게 몰래 보고했다. 장기간 이런 상태에 처해 있다 보니 내가 밖에 나가서 진상을 알리고 수련생과 왕래하는데 모두 심각한 장애와 압력이 되었다.

나는 가방 속에 늘 스카프나 모자, 외투 등을 넣고 다니며 각종 사람의 방식으로 그들의 감시를 따돌렸다. 또 매일 이 문제를 겨냥해 전문적으로 한 시간 발정념을 했다. 당시 내가 직면한 가정과 사회 환경이 아주 열악해서 사존의 가호 하에 비록 여러 차례 마난에서 벗어날 수는 있었지만, 줄곧 비틀거리며 걸어왔고 아주 많은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하지만 이런 상황을 개변하지 못해 속으로 아주 고통스럽고 어쩔 수 없다고 여겨왔다.

그런데 ‘전법륜’을 외운 후 어느 날 머릿속에 한 가지 염두가 문득 떠올랐다. ‘소구 물류관리처에 선(善)을 권하는 편지를 보내자!’ 이 생각에 나 자신도 깜짝 놀랐다. 왜냐하면 나는 어려서부터 가정환경이 어려워서 늘 남에게 무시를 당해왔고 늘 이유 없는 강권(强權)에 억눌려왔기 때문에, 강권 앞에서는 어떻게든 참고 견디며 가능하면 회피할 방법을 찾아 자신을 감싸고 상처를 줄이려고만 해왔기 때문이다. 이런 성장 경험 때문에 나는 소심하고 내향적인 성격이 되었고 남들과 왕래도 거의 하지 않고 말도 잘하지 못하는 성격을 형성했다. 그러니 일에 봉착해 피동적으로 감당하기만 했지 주동적으로 나서는 것은 원래 나의 풍격이 전혀 아니었다.

선을 권하는 편지를 쓰라는 이 일념은 나를 깜짝 놀라게 했고, 나는 갑자기 확 트였다. 나는 곧장 행동에 나서 내가 왜 대법을 수련하게 되었는지, 파룬궁이 박해받은 진상과 그들의 감시활동이 내게 준 피해 및 그들의 입장에서 그들을 위해 선을 권고하는 내용 등 몇 페이지 분량의 편지를 썼다. 또 편지를 몇 부 복사해서 커뮤니티 보안관리자에게 먼저 보여주고 물류관리처 책임자에게 전달해서 보게 했다. 이 편지는 그들에게 아주 큰 충격을 주었고 감시에 참여한 사람들은 다시 나를 볼 때 모두들 아주 미안하게 여겼다.

얼마 후 커뮤니티를 담당하는 물류회사가 바뀌자 이번에 나는 진상을 알리는 범위를 확장해서 그들에게 선을 권하는 편지를 썼으며 여러 장을 복사했다. 그리고 우리 주택 지구의 업주(業主)위원회를 찾아가 그들의 이해와 협조를 구하는 방식으로 진상을 알렸다. 아울러 복사한 편지를 그들에게 보여준 후 새로 온 물류업자에게 전달해 업주위원회 명의로 업주들을 감시하는 활동을 저지해줄 것을 희망했다.

이 일련의 ‘연속 공격’은 상당히 성공적이었다. 진상을 알린 후 업주위원회 사람들은 모두들 정의롭게 나를 지지했으며, 새로 온 물류회사 상부에서 사람을 파견해 감시업무를 완전히 취소시켰다. 이를 통해 나는 또 여러 사람들의 존중을 받았다.

이는 또 나중에 내가 ‘노크행동’이나 ‘제로화(清零)’ 박해에서 구도자와 피구도자의 위치를 바로 잡을 수 있도록 도와주었고, 대선지심(大善之心)으로 인정과 이치에 따라 진상을 알리고 정정당당하게 삼서(三書)에 대한 서명을 거부하고 자신의 신앙을 수호할 수 있도록 했다. 이는 또 아주 흉흉한 기세로 나를 찾아왔던 경찰과 커뮤니티 사람들이 돌아갈 때는 모두들 아주 얌전해져서 나를 존중해줬다. 또 이후에는 가급적 나를 찾아와 소란을 피우지 않았고, 설사 위에서 압박을 가해도 형식적으로 대처했다. 지금 나의 수련 환경은 이미 상당히 느슨해졌으며 장기간 나를 박해해왔던 사악의 감시가 해체됐다.

이 전체 과정 속에서 나의 심성(心性) 역시 끊임없이 제고되었다. 처음에는 곤경에서 벗어나려고 생각했지만, 나중에는 한 걸음씩 타인을 구도하는 것으로 승화되었다. 이 과정 중에 끊임없이 자신의 내심을 열고 자신의 두려운 마음을 정시(正視)했으며 각종 부면(負面) 사유를 해체했다. 전에 내가 가장 회피하고 싶었던 권력층에 대해서도, 설령 그들이 군중조직이어도 직면할 수 있게 됐다.

전에 무시당하고 억눌렸던 각종 일들이 모두 소위 군중조직이 직접 한 것이었기 때문에 나는 여태껏 마음속으로 각종 ‘위원회’를 두려워하면서 늘 이런 기구나 구성원들을 피해 왔었다.

나는 전에 두 차례 사악에게 납치당한 적이 있다. 검은 소굴 안에서 이런 권력기관과 그 구성원들을 직면한 적이 있지만, 그때는 형세상 이미 생사를 내려놓으니 도리어 내심이 차분해지면서 두려움이 없어졌고 정념이 충족해져서 진상을 알려 검은 소굴을 탈출할 수 있었다. 하지만 평소 생활 속에서는 늘 사람의 상태가 우세를 차지했다. 만약 법에 녹아들어가 대법의 힘으로 나를 가지해주고 인도해주지 않았다면 나처럼 이렇게 겁이 많은 여자가 어찌 주동적으로 이들을 직면해 구도할 수 있었겠는가? 스스로 생각해봐도 기적이었다.

초상적인 힘이 자신도 모르게 나를 개변시켰고, 나로 하여금 매 한 계단을 마치 맞춤 제작한 것처럼 올라갈 수 있게 해줬다. 매 한걸음마다 헛발을 디디지 않았다.

‘전법륜’을 외우기 전에는 정법수련의 길에서 늘 이리저리 넘어지면서 험난한 상황이 끊임없이 나타나곤 했다. 일을 함에 아주 큰 노력을 들였어도 효과가 좋지 않았다. 지금은 대법의 지도하에 오히려 나쁜 일이 좋은 일로 바뀌게 해주었는데, 무엇이 ‘유암화명우일촌(柳暗花明又一村)’인지 느낄 수 있게 되었다.

이런 변화는 입체적인 것으로, 동시에 또 신체에서도 표현되었다. 나는 전에 새벽연공을 하루도 빠지지 않았지만 수면이 부족해서 늘 피로했다. 매년 기침이 나거나 몸이 차가운 등의 증상을 느꼈다. 하지만 ‘전법륜’을 외운 후 어느 날 문득 포륜(抱輪)시간을 연장하라는 염두가 생겨났다. 당시는 새로운 연공음악(역주: 중문 밍후이왕에 올라온 60분짜리 2장 연공음악)이 나오기 2년 전이라 모두들 1시간 포륜을 하지 않을 때였다.

나는 2시간 포륜을 시작했다. 이 포륜은 신체에 커다란 변화를 주었고 확실히 몸이 건강해졌다. 추위도 참을 수 있게 되었고 더 이상 기침을 하지 않았다. 수면시간이 아주 적었지만 오히려 정신이 아주 맑아졌고 머리도 청성해졌으며 피곤하지 않았다.

나는 매일 시간을 아주 타이트하게 안배했는데, 저녁 9시 20분 연공(새벽연공으로는 시간이 부족해서 어쩔 수 없이 저녁에 연공한다)을 시작하는데 30분간 동공(動功)을 하고 가부좌를 2시간 한 후 자정 발정념을 끝내고 나서 2시간 30분간 포륜을 한다. 이것이 끝나면 새벽 3시쯤 된다. 5시 30분에 자명종을 맞춰 일어나서는 6시 30분까지 1시간 발정념을 하고 잠깐 눈을 붙인다. 오전에는 법을 외우고 오후에는 혼자 전자레인지로 어제 저녁에 먹다 남은 밥을 데워 먹고 몇십 분간 낮잠을 잔다. 오후에는 사람을 구하고 법을 실증하는 일을 하러 나가는데 그리고 나서 가족들 저녁을 준비한다. 저녁에 집안일을 끝낸 후 밍후이왕에 접속해 그날 문장을 읽고는 9시 20분에 연공을 시작한다.

매일 저녁 온전히 자는 시간은 겨우 2시간 반에 불과하지만 나는 잠이 부족하다는 생각이 없었다. 다만 연공과 발정념 시간을 연장하되 소중한 낮 시간을 차지하지 않으려면 오직 수면 시간을 짜낼 뿐이라고 여겼다. 원래 이렇게 하려고 생각한 것은 아니지만, 점차적으로 조정하는 과정 속에서 이런 상태에 도달했고 느낌이 괜찮았다. 수면시간은 적어졌지만 오히려 정신은 더 좋아졌고 피곤하지도 않았다. 최근 몇 년간 이렇게 고정되었다.

우리 법공부 소조 동수들이 내 상황을 알고는 어떤 이는 나처럼 이렇게 ‘전법륜’을 외우고 포륜을 연장한 후 아주 좋다고 한다. 또 어떤 동수는 나더러 고생한다고 말하는데, 나는 이것이 고생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 자세히 생각해보면 오히려 꿀을 먹는 것처럼 달콤하다. 나는 젊어서부터 몸이 허약하고 추위를 타서 하루 종일 쓴 한약을 먹어야 했고 사람들에게 ‘임대옥(林黛玉 역주: 소설 《홍루몽》의 여자 주인공으로 몸이 허약해 청순가련한 여인의 대명사)’이라 불렸다.

지금 나는 이미 70세가 넘었지만 오히려 걸음걸이가 가뿐하고 눈과 귀도 총명하다. 나는 자신을 전혀 노인이라고 의식하지 않는다. ‘노인’이란 이 단어는 마치 나와는 전혀 무관한 것 같다. 소위 ‘노크행동’이나 ‘제로화’로 나를 찾아온 경찰이나 관계자들도 모두 나더러 정신이며 성격이 아주 좋다고들 말한다. 겉으로 보면 마치 50대로 보인다며 내심으로 파룬궁이 좋다고 인정한다. 나는 그들 앞에서 바로 살아있는 진상인 셈이다.

연공 중에 또 한 가지 에피소드가 있다. 본래 연공은 몸을 이완하되 해이해지지 말 것(松而不懈)을 요구하는데, 다년간 가부좌를 하는 중에서 서서히 연공의 요구에서 멀어져 몸이 이완되면서도 해이해졌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자신의 등이 굽어 있고 허리와 배 근육이 약해져서 오랫동안 허리를 꼿꼿하고 단정하게 앉아 있지 못하는 것을 발견했다. 고쳐보려고 시도했지만 이미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나는 주변 대부분의 동수들 사이에서도 이런 현상이 보편적임을 발견했다. 신체에 문제가 나타난 노인 동수들은 연공자세가 바르지 못한 것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문제로 고뇌하던 중에 어느 날 머릿속에서 일념이 떠올랐다. ‘션윈 단원들의 신체훈련이 정말 좋다!’

나는 단번에 깨달음을 얻었다. 무용 연습동작과 연공은 충돌하지 않으니 가장 간단하면서도 효과적인 한 가지 무용 연습동작을 이용해 한번 교정해보아야겠다. 어떤 무용 교사가 전에 벽에 몸을 붙이는 것이 효과가 있다고 해서 나는 곧 벽에 몸을 붙여보았다. 발뒤꿈치를 서로 밀착시키고 다리를 일자로 쭉 뻗은 후 두 다리와 배를 당기고 엉덩이를 벽에 붙이고 어깨를 늘어뜨리되 어깨 뒤쪽과 등 및 머리를 모두 벽에 붙여 움직이지 않는 자세로 10분을 선다. 서 있을 때는 시간을 낭비하지 않도록 법을 외웠고 끝낸 후에는 계속해서 가부좌 자세로 법을 외웠다.

또 연공할 때 근육이 기억할 수 있도록 골반을 지탱하고 허리와 척추를 똑바로 세워 몸을 단정(端正)하게 하자 곧 효과가 나타났고 몸이 기울어지지 않았다. 이 역시 내가 나중에 2시간 30분 포륜을 할 때 몸이 이완되어도 해이해지지 않을 수 있는 좋은 기초를 다져주었다. 아울러 밖에 나가 걷는 자세도 좋아져서 젊을 때의 걸음걸이를 회복했다. 이렇게 좋은 정신과 외모를 지닌 것은 내가 진상을 알릴 때 아주 좋은 작용을 일으켰다.

마음을 들여 ‘전법륜’을 외우면서 이외에도 아주 많은 깊은 감수가 있는데, 법 자체에 대한 이해도 심화되어 자신의 경지가 층층마다 위로 나아갈 수 있도록 했다.

‘전법륜’ 외운 감수 몇 가지를 들어보겠다. 가령 절 단위로 통째로 외우는 과정에서 단락과 단락 사이의 연계를 기억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 사이의 내재적인 논리 관계에 대한 깊은 이해가 있어야만 제대로 기억할 수 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문득 원래 이런 내재적인 구조 역시 한층 법리(法理)가 펼쳐진 것임을 발견했다. 이는 표면적인 문자 위에 있는 게 아닌데, 마치 사람 신체 표면에서는 볼 수 없는 경락(經絡)과도 같았다. 경락은 인체 구조의 보다 깊은 한 층의 체현으로 수련해서 육안통(肉眼通) 층차를 초월하지 않으면 볼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일단 볼 수 있게 되면 당신은 그 한 층의 경계가 단번에 펼쳐지는 것을 볼 수 있다.

또 나는 화이트보드를 하나 사서 기억하기 어려운 일부 단락들을 조용히 써보았다. 법을 외우는 과정 중에 표점(標點) 부호는 대부분 소홀히 넘어간다. 그런데 이렇게 써보고 나서야 비로소 표점 부호 역시 법(法) 입자의 표현임을 발견했다. 이런 표면 형식을 통하지 않으면 이해할 수 없으며 당신은 이런 종류의 존재를 인식할 수 없다. 내가 의도적으로 이런 표면구조를 파고 들어간 게 아니라, 단지 무의식중에 모종의 것을 접하고 느낀 것이다. 뜻으로는 이해할 수 있지만 말로는 표현할 수 없다.

정성껏 법을 외우는 것은 그야말로 너무나 현묘해서 늘 표면문자를 이해하는 과정 속에 문자 배후의 방대한 법리가 자신도 모르게 당신이 마땅히 알아야 할 내포를 펼쳐낸다. 나는 통독을 하든 아니면 ‘전법륜’을 몇 번 외웠든지 막론하고, 법을 배울 때는 늘 자신의 머리를 한 장의 백지처럼 변하게 해서 완전히 새로운 방식으로 ‘전법륜’의 표면 의미를 이해해야 함을 체험했다.

이 표면 의미는 마치 ‘보물을 저장한 동굴’의 입구와도 같아서 반드시 이를 통해야만 안으로 들어갈 수 있고, 비로소 동굴 깊은 곳으로 들어가 그 속에 숨겨진 보물을 얻을 수 있으며, 법이 비로소 당신 이 층차 속에서 마땅히 알아야 할 내포를 펼쳐낼 수 있다.

‘전법륜’을 외우기 이전을 생각해보면, ‘전법륜’을 천백 번 읽었고 앞 구절을 보면 곧 뒷 구절을 알았으며 내용이 아주 익숙하다고 여겼지만 지금에 와서야 비로소 그것이 얼마나 무지한 것인지 알게 되었다. 우주를 육성한 근본인 ‘전법륜’의 깊이와 넓이는 끝이 없는 것으로, 그 어떤 수련자든 평생을 연구해도 단지 수련 중에서 층층 전진하면서 일부분 진기(真機)를 알 수 있는 것에 불과하다. 때문에 산기슭 아래에서 배회하면서 곧 산을 안다고 여겨서는 안 되는데 사실 아직 산을 한걸음도 올라가지 못한 상태에서 본 것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무릇 ‘전법륜’을 외우는 동수들이라면 모두 동감할 텐데, ‘전법륜’을 외우는 것은 아주 좋다. 하지만 이 ‘아주 좋음’은 오히려 말로는 표현할 수 없다. 종종 느낄 수 있고 뜻으로 이해할 수는 있지만, 자신이 직접 경험해야만 비로소 알 수 있다. 내 생각에 생명의 심층이 이 과정 속에서 불법(佛法)의 홍대(洪大)함을 감수할 수 있는데, 그 현묘하고 깊고 광활하며 원융(圓融)함은 말로는 표현할 수 없다.

사람의 언어는 단지 표면의 단일한 것으로, 가령 내가 이 원고를 쓰면서도 늘 표현이 정확하지 못함을 느낀다. 말로 하면 다 단편적이며 비유 역시 제한적이다. 다만 피상적인 부분만을 말해 여러분들의 보다 좋은 의견을 이끌어내고자 할 따름이다. 아마도 ‘전법륜’을 여러 번 외우거나 또는 묵묵히 써본 수련생들이라면 분명 법에 대해 나보다 더 깊고 절실한 체험이 있을 것이라 믿는다.

우리 사존께서 부여하신 ‘전법륜’을 소중히 여기고 마음을 써서 법을 배우고 법을 외워 공동으로 제고합시다!

사존께 감사드립니다!

 

​원문발표: 2022년 1월 10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正體 https://big5.minghui.org/mh/articles/2022/1/10/434838.html
简体 https://www.minghui.org/mh/articles/2022/1/10/434838.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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