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중국 대법제자
[밍후이왕] 나는 올해 65세이고, 대법 수련에 들어온 지 거의 23년이 되었다. 요 몇 년 동안 밍후이왕에서 수련생들이 쓴 교류 원고를 보면서 많은 혜택을 얻었다. 나도 수련 체험을 써내고 싶었다. 오늘 드디어 붓을 들어 23년 가까운 수련 길에서 겪은 일들을 써서 사부님께 보고드리고 수련생들과 교류하기로 했다.
1. 고난의 인생
나는 농촌에서 자라 초등학교 3년 반을 다니다가 문화대혁명을 앞두고 공부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 자매가 많고 집안도 가난해 두 오빠는 모두 나에게 학교를 그만두고 소를 방목하라고 강요했다. 그래서 나는 집에서 4년 동안 소를 방목했다.
나는 14~15세 때 높은 죽마를 타다가 류머티즘 관절염에 걸려 매일 다리가 아프고 왼쪽 무릎이 크게 부었다. 부모님은 여러 가지 민간처방을 썼지만, 나의 병을 고치지 못하셨다. 한번은 내가 허난(河南)에서 풍습(風濕)을 치료하는 마전자산(馬前子散) 한 봉지를 샀는데, 과다 복용으로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했다.
내가 스물세 살 되던 해, 넷째 언니 소개로 나보다 열한 살 많은 남자에게 시집갔다. 나는 밥도 할 줄 몰랐고, 돼지치기도 몰랐으며, 농사도 지을 줄 몰랐기 때문에, 남편은 사흘이 멀다고 나를 때렸다. 시누이와 시숙모도 나를 때려 나는 너무 화가 나 그만 죽고 싶었다. 한번은 정말 죽고 싶었지만 죽지 못했다. 매일 화가 났기 때문에 나는 또 뇌병(腦病)에 걸려서 밤에는 잠 못 자고 낮에는 생각만 하면 울고 싶었다.
스물네 살에 아들을 낳았는데, 사흘도 안 되어 죽었다. 나중에 또 딸 둘을 낳았지만, 남편은 여전히 나와 싸웠다. 나는 밥할 줄 몰랐고 돼지를 칠 줄도 모르니 한바탕 얻어맞아야 하기는 했다. 나중에 산후두통에 걸려서 낮에 외출해 다녀오면 진통제 몇 알을 먹고 통증을 가라앉혀야 했고, 밤에 잠잘 때 밤새도록 목도리로 머리를 감싸야 했다.
나는 신체의 고통을 견뎌야 했을 뿐만 아니라 정신적 충격도 잇따랐다. 둘째 딸이 여섯 살 되던 해 여름에 딸을 데리고 시장에 갔다가 아이를 잃어버렸는데, 나중에 친척이 아이를 보고서 데려왔다. 그리고 둘째 딸은 남이 태워 주는 자전거를 타다가 다리가 부러져, 의사가 두 차례나 붙여 겨우 잘 붙었지만, 1년이나 걸려 그때는 충격이 너무 컸다.
생활 속 고난과 몇 차례 충격으로 심신은 끝없이 고통을 받았다. 고질병이 낫지 않았는데 새로운 병이 또 나타났다. 내 몸은 엉망이 되었다. 약을 적지 않게 먹었지만, 병은 낫지 않았다. 나는 이렇게 병고에 시달리고 있었다.
2. 대법을 얻어 글자를 배웠고 신기함이 나타나다
1988년 우리는 도시로 이사해서, 다음 해 감옥의 서쪽 벽 밖에 방 세 칸을 지었다. 나는 왼쪽 다리를 절뚝거리고 류머티즘으로 온몸이 아팠으며 몸에 온기라고는 조금도 없었고 부인과 병도 있어서 매일 약을 먹었다. 밤에는 잠이 안 와 수면제를 먹었다. 1998년, 나의 운명에 근본적인 변화가 생길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8월 말 어느 날, 나는 강가에서 빨래하다가 큰 언니를 만났다. 언니는 파룬궁이라는 기공을 배우고 있다고 나에게 말했다. 그녀는 이 기공을 배우면 약을 먹지 않아도 병이 곧 나을 거라고 말했다. 그때 나는 정말 가짜라고 생각했다. ‘어떻게 약을 먹지 않아도 병이 나을 수 있겠는가?’ 큰언니는 내가 믿지 않는 것을 보고 계속 나에게 말했다. 언니는 나와 함께 우리 집에 왔다. 언니가 말하면 나는 웃었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지기 싫어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공산당 문화 교육까지 있어서 큰언니의 말을 나는 정말 믿기 어려웠다. 여하튼 오랫동안 병고에 시달린 나는 마음이 움직였다.
다음날, 이웃 언니와 함께 파룬궁 수련자의 집에 갔다. 나는 그 집에 이 공(功)을 배우는 사람이 여러 명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내가 가서 물었더니, 그들은 모두 파룬궁이 병을 없앤다고 해서 나는 바로 배우고 싶어졌다.
1998년 8월 27일 그날 밤, 이웃 언니와 함께 그곳에 가보니, 방에 가득 찬 사람들이 모두 연공하고 있었다. 보도원은 우리에게 정공(靜功)을 가르쳤고, 정공을 마치고 법학습을 했다. 보도원은 우리에게 ‘전법륜’을 한 권씩 빌려주었다.
책을 펼치자 나는 넋이 나갔다. 책 속 글자의 대부분은 모르는 것이었다. 글자를 알아보는 것이 내가 법을 배우는 데 큰 난제가 되었다. ‘이거 어떡하지?’ 그러나 나는 배우고 싶어서 다른 사람이 읽는 것을 듣고 스스로 열심히 기억했다. 나중에 방법을 생각해 냈다. 우리 집에 작은 공책이 있는데 매번 법을 배우러 갈 때마다 작은 공책과 연필을 가져가 법을 배우면서 읽을 수 없는 글자를 적어 두었다. 무엇을 읽는지 기억하지 못하면 내가 아는 글자로 대체했다. 어쨌든 내가 기억할 수만 있으면 되었다. 다시 기억할 수 없으면 나중에 수련생에게 물어보거나 집에 가서 아이에게 물어보거나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 법을 배우기가 정말 쉽지 않았지만 나는 아주 열심히 공부했다. 당시 두 딸이 모두 학교에 다녔고 집에 돈이 얼마 없어서 나는 모두 9권의 대법경서(大法經書)를 겨우 샀다. 내가 구입한 몇 권의 학생용 대본(大本)과 내가 직접 제본한 책으로 이 9권 대법경서에 있는 낯선 글자를 모두 쓰니 총 6권이 되었다. 나는 현재 37권 대법경서에서 기본적으로 모르는 글자가 없다.
또 ‘홍음’ 두 권을 샀는데 한 권은 번체자였다. 나는 모르는 글자를 써서 수련생에게 번체자를 가르쳐 달라고 해서 모두 배웠다.
3년 전 수련생인 여동생이 번체자 양장본 ‘전법륜(轉法輪)’ 한 권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책을 빌려와서, 먼저 책상 위에 깨끗한 천을 깔고, 그다음에 가부좌하고 공손하게 대법경서를 받쳐 들었다. 그런데 넘겨보니, 놀랍게도 안에 있는 글자는 내가 모두 아는 글자였다. 이 모두 다 사부님께서 도와주셨다!
나는 매번 법을 배울 때마다 ‘전법륜’ 책 속의 글자 하나하나가 모두 금빛으로 반짝이고 가지각색이며 문장 부호마저 금빛으로 반짝이고, 대법경서 표지도 빛나는 것을 보았다. 내가 읽은 대법 경서는 모두 새 천 표지였고, 바깥은 비닐 껍질을 덧씌웠다.
법을 배운 지 일주일도 안 되어 온몸의 병이 다 나았으며, 집안의 약을 모두 버렸다. 전에 나는 일 년 내내 약을 먹어 웃는 낯이 드물었고 잘 웃지 못했다. 대법을 배운 후 내 마음속은 정말 기뻤다. 다른 사람들도 내 얼굴이 발그레하고 웃음을 띠고 있다고 했는데, 나는 마침내 스스로 웃을 줄 알게 되었다. 법을 배운 후, 모든 일을 사부님의 요구에 따라 했다. 먼저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지 살피고, 먼저 다른 사람을 생각하며 시시각각 안으로 자신의 부족함을 찾았다. 대법은 내 신체를 정화했고 도덕을 향상했다!
3개월 동안 법을 배우자 사부님께서는 천목(天目)을 열어 주셨다. 나는 사람의 언어로 형용할 수 없는 너무나 아름다운 태양을 보았다. 나는 무수한 파룬(法輪)이 태양에서 나오는 모습을 보았는데, 너무 정교하고 아름다웠다. 온 하늘이 파룬이었다. 각양각색으로 작은 것, 큰 것, 그리고 더욱더 큰 것이 있었다. 태양에는 아직 많은 신비로움이 있었고, 달도 너무너무 아름다웠다. 연꽃처럼 아름다웠다. 또 더욱더 심원(深遠)한 9대 행성을 보았는데, 행성 위에도 파룬이 있었고, 모두 매우 아름다웠다. 때때로 온 하늘의 파룬이 땅에 떨어지고 벽에 떨어지며 내 몸과 얼굴에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그런 광경은 정말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미묘했다.
3. 박해 초기에 위험을 무릅쓰고 진상을 알리다
법을 얻은 후 몇 년 동안 좋은 나날을 보냈는데, 99년 7·20 후에 대법은 잔혹한 박해를 받았다. 수천수만의 대법제자가 모두 개인의 안위를 돌보지 않고 베이징에 가서 법을 실증했으며 대법을 위해 바른말을 했다. 그때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랐다. 손에 가진 돈이 없어 섣불리 가지 못했고, 동서남북도 몰랐다. 종일 넋이 나간 사람처럼 밥을 할 생각도 없이 어떻게 나갈 수 있을까 하고 생각했다.
우리 집은 감옥의 서쪽 벽 밖에 있으며, 감옥에서 30보(步)도 떨어져 있지 않았다. 감옥의 큰 벽은 십여m 높이로 주위는 모두 전기 철조망이며, 나이 어린 무장 경찰이 2시간에 한 번씩 보초를 교대했다. 2002년 가을 어느 날 밤, 매우 생생한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나는 큰 시장에 갔다. 서쪽에서 들어가니 안에는 사람들이 매우 밀집되어 있었는데 한 걸음씩의 거리였다. 나는 남색 양복 안에 흰 셔츠를 입고 발그레한 얼굴에 웃음을 머금은 채 한 걸음 한 걸음 서쪽에서 동쪽으로 나갔다. 이때 누군가가 대문을 3번 두드리는 소리를 들었고, 니는 소리지르며 일어나 앉았다. 시계를 보니 겨우 3시였는데 사부님께서 나를 점오(點悟)하시는 것 같았다. 나는 거기에 그대로 앉아서 날이 밝기를 기다렸다. 7시가 되자 두 아이가 잠에서 깼다. 나는 아이들에게 거실에 가서 잔돈을 좀 바꾸겠다고 말했다. 사실, 나는 주머니에 5원을 넣었고, 진상 그림 2장, 큰 것 1장, 작은 것 1장도 주머니에 넣었다. ‘오늘 감옥에 들어가 반드시 진상 자료를 붙이고, 죽게 되면 죽겠다’라고 생각했다. (당시의 깨달음이다)
그날은 일요일이어서 마침 교도소에 가족 면회가 있는 날이었다. 내가 갔을 때 그곳에는 남자 1명과 여자 1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 두 사람은 일찍 왔고 면회실 문이 아직 열리지 않았으며 그들 두 사람 얼굴이 모두 서쪽을 향하고 있었다. 내가 인사하니까, 그녀는 나도 친척을 면회하러 온 줄 알고, 나에게 면회실은 8시에 문을 연다고 말했다. 나는 면회실 입구에 서 있었는데, 남쪽에서 10여m 떨어진 경비실 문이 모두 열려 있고 무장 경찰들이 식사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나는 이 틈을 타서 준비해 간 대형 진상 그림을 면회실에 바짝 붙어 있는 칠판에 매우 바르게 붙였다. 작은 것은 칠판 왼쪽 벽에 붙였다. 작은 그림을 붙일 때 가슴과 손이 떨렸지만 순조롭게 붙인 후, 한 걸음 한 걸음 걸어 나갔다. 사부님께서 나를 지켜주신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또 한 번은 무장 경찰의 보초 교대하는 틈을 보고는 망루에 올라가 진상 자료를 붙였다. 초소는 우리 집에서 100m 정도 떨어져 있었다. 그날 저녁 7~8시에 마침 초소 교대할 때가 되자 나는 신발을 벗고 감옥의 큰 담장 밑을 따라 앞으로 걸어갔다. 초소는 둥글고 주위는 모두 전기 철조망으로 3~4m마다 헤드라이트가 하나 있었고, 빙글빙글 돌며 모든 곳을 비췄다. 초소는 3층이고 2층 주위는 넓은 조망대로 무장 경찰이 보초를 서는 장소이다. 나는 뒤에서 고개를 숙이고 3층으로 들어가서 붙였다. 다 붙이고 서쪽으로 나갔다. 무장 경찰 2명이 총을 들고 서서 남쪽을 보고 있었다. 나는 아무 일 없이 집으로 돌아왔다.
우리 집 앞에 사는 이웃 사람 중 세 집이 교도관이고, 또 한 집은 교도소 부소장이며, 다섯 번째 집은 소장의 언니다. 그때 나는 진상 소책자를 집마다 보내어 장쩌민이 파룬궁 박해하는 것을 모두에게 알리고 싶었다. 뒤에 있는 교도관 2명이 수용소에서 반대편으로 멀리 갈 수 있기에, 나는 무장 경찰의 보초 교대하는 시간을 살폈다. 망루를 지나서 다시 신발을 벗었다. 문밖 길은 매우 좁고 앞쪽은 수용소이며 수용소의 뒷벽에는 아주 깊은 큰 도랑이 있어 자칫하면 떨어질 수 있다. 나는 진상 자료를 두 번 전했는데 한 번은 기어가서 자료를 문 안에 꽂은 후에 순조롭게 집으로 돌아왔다. 사부님께서 시시각각 내 곁에서 나를 지켜주셨다.
초기에 나는 집 주위의 감옥 부근에 진상 표어를 붙이고 진상 자료를 보내는 것 외에도 자전거를 타고 먼 곳으로 가서 진상 소책자를 전했다. 갈 때마다 자료를 큰 가방에 싣고 적어도 60여 권을 전했는데, 몇 권을 전했는지 분명하게는 기억나지 않는다. 2004년 ‘공산당에 대한 9가지 평론(九評共産黨, 이하 ‘9평’)이 발표된 후 나는 ‘9평’을 직접 전하기 시작했다. 농촌에 가서 집마다 전하고 터미널에 가서도 전했는데 대략 2만여 권을 전했다.
나는 마흔여덟 살이 되어서야 자전거 타는 법을 배웠다. 큰딸이 나에게 준 중고 자전거였다. 나는 상점에 가든지 시장에 가서 자료를 전하든지 간에 지금까지 자전거를 잠가 본 적이 없고 잠글 줄도 몰랐다. 다른 사람이 가르쳐 주었지만 할 수 없었다. 자료를 전할 때마다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사부님, 제자의 자전거를 봐주세요. 제가 자료를 전할게요.’ 매번 돌아와 볼 때마다 자전거는 멀쩡하게 거기에 있었다. 내가 그때 자료를 전한 것은 대부분 비 오는 날, 눈 오는 날에 건물에서 전한 것이고 좋은 날에 전한 적은 거의 없었다. 지금은 좋아졌다. 어떤 날씨든지 나는 당당하게 얼굴을 맞대고 말할 수 있다.
당시 나는 큰언니 수련생과 함께 나갔다. 2002년 한여름, 나와 큰언니는 함께 ‘파룬따파하오(法輪大法好-파룬따파는 좋습니다), 쩐싼런하오(真善忍好-진선인은 좋습니다)’ 현수막을 내걸었다. 현수막은 길이가 1m 30cm, 너비는 약 15cm~16cm였다. 나는 현수막을 천 가방에 넣고 가방을 목에 걸었다. 우리는 오후 11시에 출발해서 고압선 송전탑에 걸었다. 내가 고압선 송전탑에 기어 올라갈 때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나는 신이다. 나는 대법을 실증하러 왔다.’ 사부님께 나를 보살펴 달라고 빌었다! 그때도 정념을 내보낼 줄 몰랐다. 큰언니 수련생은 땅바닥에 앉아 정념을 내보냈다. 내가 3m 높이까지 올라갔을 때 손을 잡아당길 수 없었고, 올라갈수록 손을 잡아당길 수 없었다. 마치 줄다리기할 때 밧줄을 당기는 것처럼 잡아당겨도 당길 수 없었다. 그 철 구조물은 기둥 사이가 넓고 나는 키가 작아서 내 다리로 건널 수 없어서 올라갈수록 더 힘들었다. 6m를 간신히 넘었을 때 다시 위로 올라가고 싶었지만, 올라갈 수 없었다. 나는 3개의 현수막을 넓은 철 구조물의 엄지손가락 굵기만 한, 쇠막대기에 걸었다. 세 개의 현수막을 순조롭게 걸었다. 아래로 내려갈 때도 손을 잡아당기지 못했다. 위쪽에서와 마찬가지로 손을 바꿔 잡을 때 큰 힘을 들여야 움직일 수 있었다. 바닥에서 약 2m 높이까지 내려왔을 때, 손의 그 잡아당기는 힘이 없어졌다는 것을 비로소 느꼈다. 나는 발이 땅에 닿는 순간 바로 설 수가 없었다. 정말 힘이 없었다. 큰언니 수련생이 다가와 나를 안아주었고 좀 쉬니까 괜찮아졌다. 우리 둘은 홀가분하게 집으로 돌아왔다. 나는 이 고압선 송전탑이 매우 위험하다는 것을 안다. 사부님께서 나를 위해 마난(魔難)을 해결해 주셨다.
또 한 번은 2004년 겨울이었는데, 나는 다시 큰언니 수련생과 함께 50리 밖의 농촌으로 가서 진상 자료를 붙였다. 우리 둘은 진상 자료 두 꾸러미를 들고 오후 3시에 차를 탔다. 먼저 우리 어머니 집에 가서 저녁 식사를 하고 저녁 9시에 나가서 붙였다. 우리는 세 곳의 마을에 붙이려고 했는데, 조금 먼 두 마을이 2리 남짓했기에, 먼저 그곳에 가서 붙였다.
우리 둘이 마을에 들어서자마자 개가 짖어 사람들이 쫓아왔다. 그들은 우리 둘을 돼지 도둑인 줄 알았다. 우리 둘은 놀라서 진흙 구덩이에 앉아 정념(正念)을 하고 있다가 그들이 돌아가는 것을 보고 일어나서 계속 붙였다. 나무, 벽, 전봇대도 붙이고 길거리 문에도 붙였다.
마지막 마을에 붙였는데 바로 친정이 있는 그 마을이다. 거리의 큰 나무들 위에 모두 붙였다. 농촌의 많은 집에서는 개를 키운다. 한 집 문 앞에 다가갔는데 우리가 붙이기도 전에 그 집 개가 짖기 시작했다. 나는 급히 솜 신발을 벗어 큰언니 수련생에게 주고 양말을 신고 가서 붙였다. 붙이자마자 그 가족이 나와서 손전등을 들고 여기저기 비추었다. 그의 집 앞에 도랑이 하나 있고 도랑에 땔나무 한 무더기가 있는데, 나는 땔나무 뒤의 도랑에 앉아서 정념을 했다. 도랑 위는 눈이고 아래는 얼음이었다. 나는 6~7분 동안 앉아서 줄곧 정념을 했다. 그 사람이 집에 돌아갈 때까지 정념을 보내고 나서야 일어났다.
날이 어두워 큰언니 수련생이 어디에서 정념을 하는지 언니를 부르지도 못해 줄곧 길에 서서 기다렸다. 오랫동안 기다렸는데 큰언니 수련생이 와서 신발을 주었다. 내가 신발을 신고 돌아갈 때 내 두 다리는 마치 두 개의 나무 막대기처럼 감각이 전혀 없고 내 다리 같지 않았다. 어머니 집에 도착해서 잠깐 있으니 다리에 감각이 생겼고, 새벽 3시가 됐다.
우리 집 부근에는 고압선 송전탑이 하나 있다. 높이가 7~8m이며 아래, 위로 모두 발 받침대가 있었다. 어느 날 오전 2~3시쯤에 나는 둥근 의자를 메고 두건을 두르고 그 철 구조물에 가서, 철 구조물의 발 받침대를 밟고 꼭대기까지 올라가 순조롭게 진상 자료를 붙였다. 내가 내려올 때 한 사람이 아래에 서 있는 것을 보았다. 알고 보니 그는 줄곧 거기에 서서 내가 진상 자료 붙이는 광경을 보고 있었다. 내가 내려오는 것을 보고 그는 천천히 갔다. 그때 나는 등받이 없는 둥근 의자를 메고 어떻게 가야 할지 몰라서 한 바퀴 돌고서야 집에 돌아왔다.
때로는 세상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진상 자료를 요구하는 감동적인 모습도 만날 수 있었다. 2003년 어느 날, 나는 진상 자료를 한 꾸러미 실었다. 그 안에 소책자 80권이 있고 CD가 10여 개 있었다. 나는 한 채소시장에 가서 자전거를 동쪽 문에 두고 정념을 보냈다. 시장 안의 모든 사람 뒤에 있는 사악한 요소를 철저히 깨끗하게 제거하고 포괄되지 않는 것이 없고, 빠뜨리는 것이 없도록 했다. 구결을 읽고 정념을 내보냈다. 사부님께서 나를 가지해 주셨고 나는 나아가 그들을 구했다.
나는 큰 가방을 들고 노점을 따라가며 한 곳씩 전했다. 막 배포가 끝날 무렵 한 60대 사람이 주동적으로 나에게 시디를 달라고 했지만 나는 없다고 말했다. 그는 나에게 다음에 와서 시디를 달라고 했다. 그리고 특별히 나에게 “내 모습을 좀 봐요. 당신은 나를 기억할 수 있겠어요?”라고 당부했다. 나는 “기억할 수 있어요. 기회가 되면 반드시 갖다 드릴게요.”라고 말했다.
잠시 후에 또 열예닐곱 살짜리 소녀가 와서 나에게 시디를 달라고 했다. 나는 가방을 더듬어 보았는데 정말 시디가 하나 있었다. 조금 전에는 발견하지 못했다. 나는 시디를 그녀에게 주었다. 진상 자료를 전하는 과정에서, 나는 비행기에 앉아 전단을 아래로 전하고 있는 것 같은 감각을 느꼈다. 아주 수승했다! 자료를 전하고 밖으로 나가서 시장 입구에 도착해 뒤돌아보니 사람들이 모두 고개를 숙이고 소책자를 보고 있었다.
다시 그 시장에 갔다. 내가 몇 권을 전하기도 전에 한 무리 사람들이 왁자지껄 떠들어대더니, 60~70권의 소책자를 다 빼앗아 갔다. 이때 한 사람이 올라와서 내 가방도 뺏어갔다. 뒤쪽에서 40대 여자가 올라와 그 사람을 껴안고는 내게 소리쳤다. “당신 빨리 도망가요. 그가 당신을 신고하려고 해!” 나는 가방을 달라고 하지도 않고 사람들을 따라 뛰어나갔다.
사람을 구하는 길에 사부님께서는 제자들을 시시각각 보살피셨다. 여러 차례 진상을 말하며 자료를 보내고 돌아오는 길에 한 무리 파룬이 나를 호위하고, 어떤 것은 또 앞에서 나를 안내하고 있는 광경을 보았다. 파룬은 모두 나를 에워싸고 나아갔다.
4. 육친 정의 관을 넘다
2003년 4월 아침, 남편은 기름에 튀긴 밀가루 반죽(油條)을 사러 나가서 큰길을 걷다가 갑자기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나는 이 큰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3일 동안 온돌에 드러누웠다. 남편의 모든 뒷일은 두 딸과 맏사위가 했다. 수련생의 격려와 도움으로 나는 마침내 몸을 일으켰다. 사부님과 대법의 요구에 따라 자신을 수련인으로 여겨 이 관을 꿋꿋이 통과했다.
일주일 후, 큰딸은 나에게 자기 집에 와서 겨우 3개월이 지난 갓난아이를 돌봐달라고 했다. 나는 딸에게 말했다. “너의 집에 갈 수 있지만 세 가지 조건을 들어줘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갈 수 없다. 첫째, 내가 법을 잘 학습하도록 해야 한다. 둘째, 연공을 할 수 있게 해야 한다. 셋째, 4~5일마다 집에 한 번 가 봐야 한다.” 사실 집에 간다고 했지만, 나는 진상 자료를 배포하고 싶었다. 큰딸은 승낙했다.
큰딸과 사위 둘은 꽃집을 열어 저녁이 되어야 집에 돌아갈 수 있었다. 나는 아이를 돌보고 밥을 짓고 빨래를 해줘야 해서 때때로 오후 10시가 넘도록 바빴다. 나는 큰딸 집에서 한 달 1주일을 머물렀는데, 그중 3일 동안 법을 배우지 못했고, 공은 별로 연마하지 못했다. 한 번은 딸과 사위가 싸우기 시작했다. 나는 짐을 챙겨 가방에 넣고 집으로 걸어가며 울었다. 집에 돌아와서 저녁에 생생한 꿈을 꾸었다. 나는 집에 수련생들이 많은 것을 보았다. 아직 입구에 도착하지 않았는데, 나는 “다들 왔나요?”라고 외쳤다. 그들은 ‘다들 와있어요!’라고 말했다. 나는 사부님께서 나를 격려하고 계신다는 것을 알고 마침내 육친 정의 굴레에서 벗어났다.
5. 내 생활에서 일어난 신기한 일들
우리 집에는 작은 정원이 하나 있어서 여름에도 채소를 좀 심을 수 있다. 10년 전 어느 날 삽으로 땅을 파다가 갑자기 뚝 하고 삽자루가 부러졌지만, 완전히 다 부러지지는 않았다. 그때 나는 걱정되어 ‘어떡하지? 누가 삽자루를 바꿔줄 수 있을까? 일단 파지 말자.’라며 삽을 그냥 놓아뒀다.
며칠 지나자 나는 다시 땅을 파서 채소를 심고 싶었다. 그 삽으로 천천히 그럭저럭 땅을 파 보고 싶었다. 내가 삽을 꺼내 보니 삽의 부러진 그 부분이 이미 자라서 자세히 보아도 부러진 적이 없는 것 같았다. 틀림없이 사부님께서 이어주셨음을 알았다. 나에게 주신 사부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는 천만 마디로도 다 표현할 수 없다.
4년 전 여름날, 나는 거리로 나가 진상을 알리고 자료를 전하며 오전 내내 걸었다. 점심때가 되어 돌아왔는데 덥고 배고팠다. 의자에 앉아서 둘러보니 집에 먹을 게 아무것도 없었다. 책상에 라면 한 봉지가 있는 것을 보고 나는 물을 반 바가지 떠서 휴대용 가스버너 냄비에 부어 넣은 다음 점화구를 열었다. 점화구에서 푸른 불꽃이 활활 피어올랐다. 나는 갑자기 생각이 났다. ‘이 가스통은 벌써 가스가 없어지지 않았나?’ 그때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나는 작은 침대에 앉아 울기 시작했다. 사부님께서 내 가스통에 가스가 다된 것을 어떻게 아셨을까? 나는 라면을 먹을 겨를이 없었다. 사부님 법상 앞에서 울며 사부님께 감사드렸다. 이 일을 쓰는 지금도 눈물이 흐른다.
2021년 봄, 상점에 가서 볶음용 솥을 하나 샀는데 솥 중간에 상표 한 장이 붙어 있었다. 집에 돌아온 후, 상표를 벗겼는데, 뜻밖에도 솥 바닥 철판도 한 조각 벗겨졌다. ‘이거 어떡하지?’ 나는 교환하고 싶었다. 수련생이 와서 나는 솥을 그녀에게 보여 주었고, 그녀도 교환해야 한다고 말했다. 솥을 큰 가방에 넣고는 갑자기 망설여져서 내일 오전에 결정하자고 생각했다.
다음 날 아침, 생각했다. ‘내가 진정한 대법제자라면 이 솥을 바꾸지 말아야 한다. 내가 바꾸러 가면 가게 주인은 틀림없이 다시 팔 텐데, 그가 또 다른 사람을 속이는 게 아닌가?’ 그래서 안 바꾸기로 했다. 나는 솥을 불판 위에 놓고 불을 켠 후 다시 솥에 기름을 붓고 기름으로 솥 바닥을 닦았다. 이렇게 닦으니 솥 안의 벗겨진 철판이 조금도 보이지 않고 흔적도 없어졌다. 나는 흥분해서 말했다. 고맙습니다, 사부님! 나는 서둘러 전화를 걸어 이 일을 수련생에게 알렸다. 어느 날, 수련생이 와서 내가 솥을 보여 줬더니 너무 신기하다고 했다. 우리 사부님께서는 너무 위대하십니다!
6. 사부님께서 두 번의 교통사고에서 나를 구해 주시다
5년 전 섣달 28일, 둘째 사위와 내가 진상 대련(對聯)을 붙이고 있었는데, 복자(福字) 한 장이 없어서 나는 자전거를 타고 사러 갔다. 복자를 사서 되돌아 길목에 도착했을 때 앞에 있는 적색 신호등을 주의하지 않아 길을 건널 때 큰 차에 치여 넘어졌다. 기사가 차에서 뛰어내려 내 자전거를 보았는데, 두 개 바퀴가 모두 고장 나지 않았다. 그는 나에게 어떠냐고 물었다. 나는 천천히 땅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나는 괜찮아요. 나는 참는 법을 배웠어요. 가 봐요.” 그 기사는 곧 차에 올라서 차를 몰고 달아났다.
나는 자전거를 밀고 천천히 집으로 갔다. 고개에 도착하자 팔과 다리가 모두 좋지 않은 것을 느꼈다. 나는 어쨌든 반드시 자전거를 집으로 밀고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집에 도착했지만, 온돌에 올라갈 수가 없었다. 나는 둘째 사위에게 차에 치였다고 말하지 않고, 내가 차를 들이박았다고 말했다. 나는 내 팔이 구부러진 것과 목, 쇄골과 오른쪽 배에 모두 멍이 든 것을 보았다. 오른쪽 다리는 무릎 아래로 부어 바짓가랑이를 걷어 올리지 못했고, 나는 말할 힘도 없었다.
나는 둘째 사위에게 집에 가서 둘째 딸에게 말하지 말라고 했다. 둘째 사위는 듣지 않았고, 바로 맏사위가 차를 몰고 두 딸을 데려왔다. 둘째 딸이 들어오자마자 신발을 찾아 나에게 신으라고 했고, 큰딸은 온돌에 올라가 내 다리가 부러졌는지 병원에 가서 검사해보자고 권했다. 맏사위는 얼른 치우고 가자고 하면서 자기 차도 가져왔다고 했다. 둘째 딸은 내가 병원에 가지 않는 것을 보고 급해서 언니와 다투기 시작했다. 나는 ‘오늘 너희가 나를 때려죽여도 병원에 가지 않는다’라고 생각했다.
큰딸은 나에게 바짓가랑이를 걷어 보여 달라고 했다. 나는 말했다. “안 봐도 돼. 다음 주에 기적이 나타나 너에게 보여 줄 거야.” 큰딸은 또 남편에게 진료소를 운영하는 사촌 형부에게 전화를 걸라고 해서, 와 보라고 했다. 나는 딸의 사촌 형부가 온다는 말을 듣고 큰딸에게 말했다. “엄마 부탁인데, 나는 병원에 안 가. 형부도 오지 말라고 해. 다음에 와 보면 기적이 나타난 것을 볼 수 있을 거야.”
나의 굳은 결심으로 두 딸은 승낙했고, 둘째 딸은 내게 밥을 해 주겠다고 고집했다. 둘째는 집에서 나에게 14일 동안 밥을 해주었는데, 정월 대보름날 그녀의 시어머니가 둘째에게 돌아오라고 불렀다. 둘째 딸이 간 후, 또 수련생이 와서 나에게 15일 동안 밥을 해 주었다. 이 스물아홉 날, 나는 매일 고통을 참으며 법을 배우고 연공하고 정념을 하며 하룻밤에 두세 시간만 잤다. 나는 이렇게 신사신법(信師信法)했는데, 마지막에는 철저히 좋아졌다. 두 딸과 사위는 마음속으로 대법은 초상(超常)적인 과학이라고 믿었다.
또 한 번은 2019년 겨울이다. 나는 자전거를 타고 이웃 마을에 가서 진상을 알리는 달력을 전하며 횡단보도를 건너고 있었다. 도로와 횡단보도 사이에 7~8m 간격으로 화단이 하나씩 분리대로 되어 있었다. 횡단보도 오른쪽에는 약 무명지 손가락 높이의 긴 받침대가 있었고 그 위에 큰 나무가 자라고 있었다. 내가 자전거를 타고 있는데 갑자기 분리대 사이에서 승용차 한 대가 튀어나와 역주행하여 내게서 겨우 세 발자국 떨어진 채 내 앞을 가로막았다. 내가 당시에 “아이고” 하는 소리를 내자 기사는 즉시 멈췄다. 나는 당시에 두려워하지 않았지만, 자전거 안장에서 내려올 수 없었고 멍해졌다. 두 손으로 자전거 손잡이를 잡고서 앞으로 가면 차에 부딪히게 되고 왼쪽으로 도는 것은 아예 불가능하며, 오른쪽으로 돌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오른쪽으로는 긴 받침대에서 두 자 너비라 돌기는 불가능했다.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랐지만, 보니 자동차와 승용차가 빙글빙글 돌아 공처럼 돌아서 뒤로 가면 4~5m는 갈 수 있었다. 그리고 자전거는 긴 받침대 위로 올라갔는데 한 바퀴 한 바퀴 위로 올라갔다. 받침대 위에 큰 나무가 자라고 있기에 자전거는 긴 받침대에 올라간 후 나무 틈새를 뚫기 시작했다. 이렇게 뚫고 저렇게 뚫었다. 그 과정에서 나는 손잡이를 잡고 안장에 앉아 있었는데 머릿속은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고 무섭지도 않았으며 어떻게 된 일인지 몰랐다. 자전거는 나무 틈새를 파고들었지만 큰 나무에는 닿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자전거가 나무 사이에서 빠져나와 내가 가려는 길을 따라 북쪽으로 달려갔는데, 보니 갈림길인 것 같아서 나는 갑자기 브레이크를 밟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자전거가 멈추었고, 나는 거기에 서서 눈물을 펑펑 흘렸다. 사부님께서 나를 구해 주셨다! 내가 고개를 돌려 보니, 그 차는 40m 떨어진 곳에서 줄곧 거기에 서 있었다.
나는 달력을 전하고 돌아와서 산꼭대기에 도착하자 또 울기 시작했다. 눈물이 멈추지 않아 집으로 돌아와서 사부님께 아홉 개의 향을 올렸다. 나는 글을 쓰면서도 눈물을 흘렸다.
수련 층차의 한계로 법에서 어긋나는 곳이 있으면 자비를 베풀어 바로잡아주시기 바랍니다.
원문발표: 2021년 11월 23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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