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후베이(湖北) 대법제자
[밍후이왕]
1. 힘들었던 어린 시절
나는 1955년 가난한 농촌 가정에서 네 명의 형제자매 중 셋째로 태어났다. 1959년 ‘위대하고(偉), 빛나고(光), 바르다(正)’라고 자칭하는 중공사당(中共邪黨)의 인위적으로 조성된 대기근으로, 중국에서 아사자가 도처에 널려있던 시절에 십여 가구에 불과했던 우리 벽촌마을에서도 2년간 37명이 굶어 죽었다. 1년 동안 우리 집에서도 아버지, 오빠, 몇 달 안 된 여동생 등 세 식구가 차례로 굶어 죽었다. 아버지는 임종 전 당시 네 살이던 나를 꼭 안아주셨다. 집에는 어머니, 언니, 나만 어렵게 살아남았다.
일곱 살 되던 해, 이모의 권유로 어머니는 우리 자매를 데리고 재혼하셨다. 새아버지는 교사셨는데 몇 년 전 배우자와 사별하셨다. 두 딸이 있었는데 나보다 나이가 많아 초등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언니는 그 집에 들어간 후 학교에 입학했다. 나는 그들이 부러워 나도 학교에 가고 싶었지만, 새아버지는 집안 형편이 어렵다며 허락하지 않으셨다. 열 살 되던 해 나는 혼자서 크고 작은 의자 두 개를 갖고 학교에 가서 반나절 동안 공부했다. 오후에 학교에 가보니 의자가 보이지 않았는데 새아버지가 아무 말도 없이 의자를 집으로 가져오신 것이었다. 내가 가만있지 않자 새아버지는 말씀하셨다. “언니 셋이 학교에 다니는데 너마저 학교에 가면 정말 집에 부담이 된단다. 더구나 여자아이가 공부해서 뭣 해?” 나는 당시 속으로 중얼거렸다. ‘당신 두 딸과 언니는 모두 여자 아닌가요?’ 나는 너무 속상해서 새아버지를 미워했다. 어머니는 나를 달래며 “얘야, 새아빠를 미워하지 마라. 새아빠가 아니었다면 너는 벌써 굶어 죽었어! 그해 너는 굶어서 온몸에 힘이 하나도 없어 어른이 안아도 목을 가누지 못하고 2년 동안 축 늘어져 있었어.” 그 뒤에 언니가 하는 말을 들었는데 그때 내가 우리 집에서 배고픈 걸 가장 참지 못해서 모두 내가 죽을 거라고 했다는데 요행히 살아남았다.
2. 명리(名利)의 각축장에서 사투를 벌이다
열다섯 되던 해, 새아버지 집안의 당숙 한 분이 나에게 어느 국영기업에 들어가도록 소개해주셨다. 1975년 나는 다른 부서로 발령을 받았다. 당시 직장에서 나에게 운전을 가르쳐 줬지만 나는 운전 지식이 없어 면허시험을 보기 전에 다른 사람에게 부탁해 ‘교통규칙, 운전상식’ 문제를 배웠다. 나는 자신의 의지력과 고생을 이겨낸 정신으로 남들이 잘 때 책을 외웠고, 더욱이 이론 방면의 지식은 모두 암기해 각고의 노력 끝에 마침내 운전면허를 땄다.
처음 운전할 때, 외제 화물 트럭을 몰았는데 운송하며 고달프고 힘든 일을 견뎌야 했다. 하루에 100km에 달하는 거리를 두 번 왕복 400km를 운전했는데, 어느 날은 하루 네 차례 왕복했다. 그 뒤 국산 둥펑(東風) 트럭을 운전했는데 100여 km의 거리를 한 번에 실어 나르고 새벽 2시에 집을 나서면 밤 10시나 돼야 집에 돌아왔다. 트럭을 몰고 인근 성(省)으로 화물을 운반할 때, 항상 나 혼자 운전했다. 트럭을 유턴해야 하는 길에서 길이 좁아 유턴하지 못할 때는 20여 세의 여자 몸으로 차에서 짐을 모두 내리고 차를 유턴한 뒤 다시 짐을 실었고, 차에서 화물을 내리지 못할 때는 현지 농민의 도움을 청했다. 때로는 타이어가 망가져 혼자 타이어를 껴안으며 교체했는데 얼굴과 몸이 온통 시커멓게 변해도 개의치 않았다. 양곡을 운반할 때 도중에 갑자기 큰 비를 만나면 매우 무거운 방수포로 차의 화물을 덮었는데 물에 빠진 생쥐 꼴이 되곤 했다. 그래도 그때는 무엇이 고생인지, 무엇이 피곤한지도 모른 채 온종일 싱글벙글했다. 함께 운전을 배운 여자 동료는 이런 고생을 견디지 못하고 그만뒀다. 남자 동료들은 모두 내가 그들을 압도했다며 이제는 좀 쉬엄쉬엄하라고 했다. 나는 그런 소리를 귀담아듣지 않고 명리를 위해 필사적으로 계속해 해마다 모범 인물로 추천되고 여러 차례 모범노동자로 선정됐다.
이렇게 꼬박 5년을 달려오면서 명예를 얻는 대신 건강에는 화근을 남겼다. 1980년 막 결혼한 뒤부터 유방종양, 갑상선 기능항진증과 극심한 두통, B형 간염, 기관지염, 폐렴, 심장병, 혈소판 감소증, 류머티즘성 관절염 등 10여 가지 질병에 걸렸다. 머리가 심하게 아프면 긴 수건으로 머리를 단단히 싸매거나 머리 오른쪽 부위를 벽에 대고 잠시 통증을 완화시켰다. 아랫배에는 큰 혹이 있어 뱃살 바깥쪽에서도 혹이 만져지고, 때로는 심장이 ‘펑, 펑’ 하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펄쩍펄쩍 뛰었다. 배가 아프기 시작하면 침대에서 베개나 이불을 배에 대고 엎드려 있었는데 의사는 위장이 차서 그렇다고 했다. 류머티즘성 관절염이 심해서 더운 한낮에도 장갑을 끼고 빨래했다. 혈소판 감소로 온몸에 군데군데 자주색 반점이 나타났고, B형 간염으로 얼굴이 누렇게 뜨고 몹시 수척하고 온몸에 기력이 없었다. 그때 내 나이는 30세가 막 지나 인생의 전성기였지만, 몸 상태는 바닥까지 내려와 자신이 열렬히 사랑하던 직업마저 그만둬야 했다.
1982년 유방 수술을 했는데 먼저 왼쪽 유방에서 달걀노른자 크기의 혹을 제거했고, 얼마 후 오른쪽 유방에도 종양이 발견돼 결국 3년 동안 모두 네 차례나 수술했다. 정신은 붕괴되고 온몸에 통증이 심해 죽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어머니는 살며시 소도(小道) 하는 사람을 찾아가 봤다고 말씀하셨는데 속칭 ‘관화(觀花)’라고 했다. 그 사람은 내 꽃나무 윗면이 온통 거미줄로 뒤덮여 생명이 저승과 얇은 종이 한 장 차이라며 사람을 찾아 깨끗이 청소해야 한다고 했다. 나는 이런 것을 믿지 않았고 성(省)의 큰 병원 등 몇 군데 병원을 찾아갔다. 결국, 의사는 내 상태가 너무 복잡해 완쾌될 수 없고 평생 고통 속에 살아야 한다고 했다. 9년 동안 계속 병원에 입원하면서 매년 나는 직장에 의료비로 5, 6천 위안을 청구했다. 몸은 허약해지고 체중은 48kg까지 줄었다. 하루하루 버티며 출근하다 집에 돌아오면 피곤해 침대에 쓰러지고 집안일은 남편 혼자 했다. 나는 내 인생의 앞날이 캄캄하다고 느꼈다. 남편이 달리기로 체력을 키워보라고 해서 매일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도록 뛰었지만, 몸이 허약해 체력만 소모되고 건강은 호전되지 않았다.
3. 대법이 나에게 새로운 생명을 주다
1997년 어느 날, 동료 한 사람이 말했다. “당신이 날마다 피곤하도록 달려도 힘만 들고 소용없지만 나와 함께 공법을 연마하면 달리기보다 훨씬 좋을 거예요.” 나는 그녀가 허황한 말을 한다고 생각하고 믿지 않았다. 어느 날 출근해서 몇십 분의 휴식 시간이 있었는데 그녀가 다시 나에게 “지금 시간이 있으니 연공을 가르쳐 드릴게요”라고 해서 나는 한번 해보자고 했다. 그녀가 나에게 제1장 공법을 가르쳐 주자 신체가 오랜만에 편안해지는 것을 느꼈고 그 후부터 나는 대법 수련의 문에 들어섰다. 이튿날 나는 수천 위안어치 약을 모두 버렸다. 직장에서 나는 유명한 환자였는데 법공부와 연공으로 신체가 단번에 건강하고 낙천적인 사람으로 변했다. 이로 인해 직장에서는 6개월 동안 30여 명의 사람이 파룬궁 수련에 입문했다.
나는 글자를 몰라 처음 단체 법공부를 시작할 때 책을 읽지 못했다. 내가 읽을 차례가 되면 항상 다른 사람에게 읽게 했고, 나는 곁에서 진지하게 듣고 집에 돌아와 정신을 집중해서 읽어봤다. 모르는 글자는 남편이 가르쳐줬다. 대법의 기적적인 힘이 내 지혜를 열어주어 그 후부터 나는 사부님의 모든 책을 통독할 수 있었다. ‘정진요지(精進要旨)’, ‘홍음(洪吟)’을 익숙하게 외우고, 보서(寶書) ‘전법륜(轉法輪)’을 벌써 두 번 외웠다. 법공부하며 나는 사부님께서 ‘전법륜’에서 말씀하신 법리가 얼마나 좋은지 알게 되고 대법 수련 후 세속을 초월한 느낌을 받았다.
4. 심한 압력 앞에서 반석처럼 견고해지다
파룬따파(法輪大法)는 나에게 새로운 생명을 주었다. 그러나 이런 고덕대법(高德大法)이 1999년 악마의 수괴 장쩌민(江澤民)의 사악한 탄압에 직면했다. 박해가 시작된 후 일하는 직장이 좀 특수한 남편은 내가 연공 하는 것을 단호히 반대했는데 나는 남편 말을 듣지 않고 수련을 견지했다.
1999년, 나와 한 수련생은 파룬궁과 대법 사부님을 위해 올바른 소리를 내기 위해 베이징에 청원을 갔는데 며칠 후 현지 공안에 인계돼 15일 동안 수감 되었다. 9월에 나는 수련생과 다시 두 번째로 베이징에 청원을 갔다가 붙잡혀 돌아온 후 불법적으로 또다시 72일간 수감됐다.
그동안 남편과 나, 두 사람의 직장 임원과 동료들은 모두 한목소리로 수련을 포기하라고 설득했다. 어떤 사람은 말했다. “당신이 연공 하지 않겠다는 보증서를 쓰고 집에서 수련하면 아무도 상관하지 않아요.” 어떤 사람은 “당신 남편에게 대법 책을 가져오게 하고 당신은 책도 이미 제출했으니 수련하지 않겠다고 성명만 하면 돼요”라고 했다. 그들이 나에게 어떤 ‘관용 정책’을 쓰든, 수백 명이 앞다투어 찾아와 권할지라도 나는 추호도 마음을 움직이지 않았다. 한번은 남편과 아이 둘이 사돈을 모셔와 함께 날 설득했는데 그들 노인 셋이 내 앞에서 무릎을 꿇고 보증서를 써달라고 애원했다. 나는 그래도 쓰지 않겠다고 했다. 바깥사돈은 나에게 “안사돈께서 책 한 권만 제출하시면 제가 많이 갖고 있으니 얼마든지 다시 보내드릴게요”라고 하셨다. 바깥사돈은 외지에서 국가보안국에 근무하신다. 나는 거절했고 72일 후 석방됐다.
집에 돌아온 후 남편은 나를 엄하게 단속했다. 외출을 못 하게 했고 날 설득하지 못하면 늘 나에게 주먹질과 발길질을 했다.
어느 날 남편은 마당 한가운데서 지름이 18mm, 60cm 정도 길이의 나선형 철근으로 내 다리뼈 부위를 후려쳤다. 나는 아파서 뒷걸음질 쳤는데 왼발이 뒤로 가자 오른발을 때렸는데 때리면서 악을 썼다. “내가 당신 두 다리를 부러뜨릴 거야. 그래도 당신이 밖으로 나갈 수 있을까? 두고 보겠어.” 내 두 다리는 맞아서 피가 줄줄 흐르고 속옷과 털 바지는 피로 물들었다. 그러자 당시 남편은 깜짝 놀라 내 다리가 부러졌다며 즉시 언니와 형부에게 전화해 빨리 날 병원에 데려가 달라고 했다. 시어머니도 깜짝 놀라 큰소리로 말씀하셨다. “사람을 죽였네. 큰일 났어! 내 아들이 감옥 가게 생겼네! 어쩌나!” 나는 이런 상황을 보며 급히 2층으로 뛰어갔다. 언니와 형부가 집에 도착해 병원에 가자고 강요했지만 나는 괜찮다며 병원에 가지 않았다. 남편은 “그렇게 심하게 때렸으니 당신 다리뼈는 틀림없이 부러졌을 거야. 부러지지 않으면 이상하지!”라며 병원에 꼭 가야 한다고 했다. 당시 나는 대법의 기적과 사부님의 자비를 실증하기 위해 그들과 함께 병원에 가기로 동의했다. 병원 2층에서 사진을 찍고 검사할 때 나는 그들이 날 부축하는 것을 거절하고 혼자 올라갔다. 의사는 상태를 보더니 다리뼈가 부러졌다고 단정했다. X레이 결과가 나오자 의사는 “파룬궁 수련은 정말 너무나도 신기합니다! 18mm의 굵은 철근으로 다리를 후려쳤는데도 뼈가 부러지지 않았네요!”라고 말했다.
2002년, 나는 혼자 시청 민원실에 가서 내가 쓴 진상 편지 한 통을 그들에게 전했다. 편지에는 사부님의 법을 두 단락 인용했는데 사부님께서 쓰신 것을 분명히 밝혔다. 주임과 부주임이 한 번 읽더니 정말 잘 썼다며 그들은 “이 말이 정말 당신 사부님께서 쓰신 건가요?”고 물었다. 나는 “당연히 그렇습니다, 저는 절대 사부님의 법을 왜곡하지 않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들은 선(善)을 권하는 편지는 내가 쓴 게 아니라며 “당신들 파룬궁은 진실을 말한다면서 왜 거짓말을 해요? 당신이 말해보세요. 당신은 학교에 다니지 않았는데 글자도 모르면서 어떻게 이렇게 쓸 수 있습니까?”라고 물었다. 나는 “이것이 바로 파룬궁의 신기한 기적입니다!”라고 했다. 결국, 그들은 민원실에서는 파룬궁의 일에 상관하지 않는다고 핑계를 대며 책임 있는 전문기관이 있으니 ‘610 사무실’로 가보라고 했다.
나는 편지를 갖고 610 사무실로 찾아갔다. 그들이 편지를 보지 않아 내가 진상을 알려줬더니 그들은 두려워 소리를 낮추라고 말했다. “그냥 집에서 수련하시면 돼요. 밖에는 돌아다니지 마세요.” 내가 말했다. “당신들은 모두 광명정대하다고 하니 어둠 속에서 숨어 지내지는 않겠지요?” 나는 그들에게 시 구치소에 불법 수감 돼 있는 30여 명의 수련생을 석방하라고 했다. 610 직원이 말했다. “어떻게 가능하겠어요. 현재도 계속 체포하고 있는데, 불가능합니다.” 나는 부처님께서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갖가지 모습으로 나타나 설법하듯이 내가 직접 체험한 방법으로 그들에게 진상을 알렸는데, 그들은 나를 제지하지 않고 묵묵히 들었다. 다 듣고는 빨리 집으로 돌아가라고 했다. 내가 말했다. “당신들이 파룬궁 수련생을 석방하지 않으면 가지 않겠어요.” 내가 가지 않으려고 하자 그들은 몰래 남편에게 전화해서 오라고 했다. 1시간이 조금 지나서 화가 난 남편이 달려와 다짜고짜 내 뺨을 두 대 때린 후 멱살을 잡고 “당신 때문에 체면이 깎였어!”라고 말하며 나를 끌고 나왔다. 나는 문을 나오며 고개를 돌려 610 직원에게 말했다. “다시 올게요!” 8층에서 1층으로 내려오면서 남편은 사람 만나는 것이 두려워 엘리베이터를 타지 않았고 계속 내 멱살을 잡고 끌어당기며 청사 광장에 나와서야 비로소 손을 놓았는데 힘들어 숨을 헐떡거렸다.
그날 시장 권한대행이 610 사무실에 갔었는데 610 직원이 방금 ○○가 파룬궁을 위해 청원 왔었다고 했다. 시장 권한대행이 “누군데요?”라고 물었다. 직원은 “○○의 부인이어서 돌려보냈습니다”라고 했다. 시장 권한대행은 즉각 소리를 지르며 “○○가 날 관리합니까? 아니면 내가 그를 관리합니까? 저녁에 가서 그 부인을 체포하세요!” 그날 저녁 나는 파출소로 끌려갔는데 다음 날 그들이 물었다. “연마할 것인지 아닌지에 따라 연마하지 않으면 집에 돌아가고, 연마한다면 차에 태워 구치소로 보내겠습니다.” 그들은 날 시 구치소로 보냈고 5개월 후 그들은 불법적으로 1년 노동교양 처분을 내려 노동교양소로 보냈는데, 신체검사를 통과하지 못해 현지 구치소로 되돌아와 줄곧 형량이 만기가 될 때까지 수감됐다.
집에 돌아온 후 남편은 내가 계속 청원 갈까 봐 걱정했고 연공 하지 못하게 하려고 달리기를 하자고 했다. 불법 수감 된 시간이 길었고 더욱이 남편이 날마다 눈을 부릅뜨고 연공을 하지 못하게 해서 나는 남편과 함께 며칠 동안 달리기를 했다. 얼마 후 나는 달리기를 하고 싶지 않다고 말했더니 남편이 말했다. “당신이 달리기하지 않으면 연공도 허락할 수 없어.” 나는 남편 말을 듣지 않고 스스로 결정하겠다고 생각했다. 어느 날 저녁, 내 방 침대 곁에서 제2장 공법을 연마하고 있는데 포륜(抱輪) 동작을 반 정도 했을 때 남편이 갑자기 들어와 허리 부위를 아주 세게 때렸다. 온몸이 단번에 침대 다른 한쪽으로 튕겨 나갔다. 만약 사부님의 보호가 없었더라면 아마 당시 내 허리는 부러졌을 것이다.
어느 날 남편이 달리기하던 도중에 집에 돌아와 내가 가부좌하고 있는 것을 보고 날 침대에서 끌어 내렸다. 나는 바닥에 떨어졌지만 결가부좌는 풀리지 않은 상태였다. 남편은 노발대발하며 옷장에서 나무 옷걸이를 꺼내어 등을 향해 세차게 때렸다. 옷걸이가 세 동강 나자 버리고 새 옷걸이를 집어 들었는데 다시 몇 조각으로 부러졌다. 남편은 힘들어 지치자 그제야 손을 멈췄다. 그렇지만 나는 아프지 않았다. 남편이 물었다. “연마할 거야, 안 할 거야?” 나는 “할 거예요”라고 대답했다. 그는 악에 받쳐 소리쳤다. “당신이 연마한다면 내가 여기서 죽도록 때릴 거야! 어차피 당신들 연공인은 맞아 죽어도 책임을 추궁할 사람이 없어!” 내가 말했다. “그 말이 정말이라면 증거 서류를 보여주세요.” 남편은 서류를 보여주지 못했다. 내가 말했다. “내가 ○○시장을 찾아가 그런 서류가 있는지 물어보겠어!” 그 후 실제로 어느 부시장의 집으로 찾아가 그녀에게 파룬궁 진상을 알려주고, 스스로 좋은 사람이 되려고 하는데 남편이 심하게 때렸다며 파룬궁 수련생을 때려죽여도 책임을 추궁하지 않는다는 서류가 있는지 물어봤다. 그녀의 운전기사가 말했다. “틀림없이 있을 거예요. 그렇지 않다면 왜 감옥에서 종종 파룬궁 수련생을 심하게 구타한다는 말이 들리겠어요?” 부시장은 목소리를 낮추며 나에게 말했다. “없어요. 어디 그런 서류가 있겠어요?” 당연히 없다. 사악은 사실이 밝혀질까 두려워 대법제자에 대한 잔혹한 박해는 줄곧 입으로만 전해져 왔다.
남편이 자주 심하게 때리는 것에 대해 내가 더는 소극적으로 감당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편이 항상 대법에 대해 죄를 짓게 할 수도 없었다. 그렇게 하면 남편에게도 좋지 않아 반드시 지혜롭게 그를 제지해야 했다. 어느 날 나는 자비롭고 한편으로는 엄숙하게 남편에게 알려줬다. “수련인은 자살하지 않아요. 내가 만약 죽는다면 반드시 당신에게 맞아 죽은 거예요. 그래서 나는 이미 유서를 잘 써서 친구에게 맡겨놨어요. 만약 내가 예기치 못한 일을 당하면 당신은 벗어나지 못해요.” 남편은 깜짝 놀라며 그 후부터 다시는 나에게 손대지 않았다.
시 정법위(政法委)와 610 사무실은 남편에게 압력을 넣어 정직시키고 집에서 반성문을 쓰게 했다. 동시에 내가 수련을 포기하도록 강요해 목적에 도달할 때 다시 출근하라고 했다. 남편은 집에서 화전양면술로 나를 협박하고 달랬지만 나는 굴복하지 않았다. 나는 남편에게 말했다. “나는 원래 온몸에 병이 있었고 집에서 아무 일도 못 했어요. 심지어 9년 동안 계속 병원에 입원했고 1년에 5, 6천 위안의 치료비를 청구해 국가에 손실을 입혔고 나 자신도 너무나 고통스러웠어요. 만약 연공이 아니었다면 내 목숨은 벌써 없었을 거예요.” 남편이 말했다. “그전에 당신이 집안일을 하지 못할 때 줄곧 내가 했잖아? 당신이 다시 집안일을 못 하게 되면 내가 집안일을 다시 할 수는 있지만 다시는 연공을 하게 할 수는 없어.” 내가 단호하게 포기하지 않겠다고 말하자 남편은 결국 이혼하자고 압박했다. 남편은 나에게 선택하라고 했다. “가정이냐 수련이냐, 대체 뭘 원하는 거야?” 내가 대답했다. “나는 두 가지 모두 원해요. 하나도 잃을 수 없어요. 사람들에게 연공 때문에 집안이 깨졌다고 말하게 할 수는 없어요. 당신이 바람을 피우지 않은 이상, 나와 이혼을 요구하려면 당신은 진실한 이유를 써오세요. 그럼 서명에 동의할게요.” 그때 남편에 관한 일부 소문을 나도 알고 있었지만, 남편은 근본적으로 나쁜 사람은 아니어서 나는 자비심에서 그를 구원해주고 싶었다. 그의 좋은 면이 쓰지 않을 것이란 걸 알고 있었다.
남편이 어쩔 도리가 없어 손을 놓자 남편과 내 직장 임원, 동료, 친구, 모든 친척이 동원됐고, 시 정법위와 610 사무실, 공안국 직원이 적극적으로 집에 찾아오기 시작했다. 매일 집에는 설득하러 온 사람이 끊이지 않았다. 남편 직장 임원은 남편의 벼슬길과 자녀의 앞날을 생각해보라고 권했다. 내가 말했다. “사람은 각자 명(命)이 있고 그들의 복은 없어지지 않습니다. 더구나 제가 수련하는데 한 사람이 수련하면 모든 가족이 이익을 얻습니다.” 610 직원이 말했다. “당신이 계속 고집부리면 당신의 공상(公傷) 퇴직을 재고하겠습니다.” 내가 말했다 “저는 십 대 때부터 목숨을 걸고 일을 했어요. 무슨 근거로 공상 퇴직이 안 됩니까? 그해 직장 임원분도 직원이 모두 파룬궁을 연마한다면 우리 직장은 무너지지 않을 거라고 말씀하셨어요.” 나의 한마디 말에 그들은 모두 말문이 막혔다. 남편의 옛 동료인 여성 간부가 나에게 많은 말을 했지만 나는 마음을 움직이지 않았고 그녀에게 성심성의껏 파룬궁 진상을 알려줬는데 결국 그녀는 “내가 30여 년간 사상 업무를 담당하면서 해내지 못한 사례가 없었어요. 처음으로 당신을 그렇게 하지 못했고 오히려 당신에게 설득됐는데, 당신 말에 일리가 있다는 것을 설명하는 거지요”라고 했다.
남편의 친구는 내가 연공 하더니 변해서 감정에 신경 쓰지 않는다고 했다. 내가 말했다. “제가 감정에 신경 쓰지 않는 게 아닙니다. 저는 먼저 당신들의 관심에 매우 감사드립니다. 그렇지만 옛말에 ‘물 한 방울의 은혜를 받으면 샘물처럼 갚아야 한다.’라는 말이 있듯이 저는 지금 사부님께 보답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사부님께서는 저에게 한 푼도 요구하지 않으셨는데 제가 몇 마디 바른말조차 못 한다면 되겠습니까?” 정법위 서기는 내 태도가 완강한 것을 보고 남편에게 이혼하겠다는 의사를 밝히라며, 우선 남편이 이혼을 제기하기 전에 그가 나와 다시 한번 대화해보겠다며 기다리라고 했다. 정법위 서기와 내가 만난 후 나는 내 입장을 천명했다. 그는 내가 왜 그렇게 파룬궁에 빠져 가정마저 포기하려는지 물었다. 내가 말했다. “저는 지금까지 가정을 포기한다고 말한 적이 없습니다. 집에서 전통 도덕에 따라 부모님께 효도한 것을 누구나 알고 있어요. 병든 시어머니를 오랫동안 모셨는데 8년간 40여 명의 도우미를 바꿔야 할 정도로 누구와도 관계가 좋지 않았지만, 시어머니는 줄곧 저만은 곁에서 모시게 했습니다. 우리의 고부 사이가 좋다는 것은 누구나 다 인정하고 있습니다. 이 모두는 제가 파룬궁을 수련하기 때문에 비로소 가능한 일입니다. 종전에는 성(省)의 각종 큰 병원의 의사조차 손을 쓰지 못한 질병으로 10여 년간 고통 속에 살았는데 파룬궁을 연마하지 않았다면 저는 벌써 죽었을 거예요. 당신은 저를 연공하지 못하게 하려 하는데 이것은 제 목숨을 가져가려는 게 아닌가요?” 그리고는 그에게 대법 진상을 알려줬다. 결국, 그는 남편을 따로 불러 조용히 말했다. “부인 말이 하나하나 사리에 맞고 이치가 있는데 상관해서 뭣 하겠어요? 상관하지 마세요! 그냥 내버려 두세요!”
남편의 직장 상사가 사상 반성문을 써서 제출하라고 했지만 내가 수련 포기를 거절해서 그들의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반성문도 제대로 쓸 수 없었다. 이리하여 남편은 사실 정황을 써야 했고 거기에 해명하는 말을 덧붙였다. “처에게는 확실히 온몸에 불치병이 있었으나 연공 해 좋아졌습니다. 그래서 아내는 결코 수련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저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 때리고, 욕하고, 심지어는 이혼까지 요구했지만, 처는 전혀 두려워하지 않아 저로서는 어떤 방법도 없고 통제할 수도 없습니다.” 직장 임원은 남편이 쓴 사상 반성문을 읽어보고 말했다. “이건 부인을 도와 파룬궁을 널리 선전하는 게 아닌가요? 됐어요. 쓸 필요 없어요.” 그들은 결국, 남편을 출근시켰다.
맺음말
사당(邪黨)의 박해 20여 년간, 수련의 길에서 온갖 풍파를 다 겪었지만 직면한 어떤 시험도 반석 같은 내 마음을 움직이지 못했다. 구치소에 불법 수감 되어 있는 동안, 시 정법위, 610 사무실, 공안이 종종 날 찾아와 “어떻게 수련할수록 어리석고 미혹에 빠져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느냐?”고 했다. 나는 대답했다. “지금 저는 생명이 존재하는 진정한 의미를 알게 됐기에 그것을 위해서라면 목숨도 아깝지 않아요.” 그들은 나에게 수련을 포기하도록 압박했는데 나는 “저는 포기하지 않습니다. 제 마음이 파룬궁에 있고, 제 신체가 파룬궁에 있으며, 매 하나의 세포마저도 파룬궁에 있습니다!”라고 했다. 610 직원은 깜짝 놀라면서 “그만 하세요, 더는 말하지 마세요. 당신 신체 매 하나의 세포마저 파룬궁에 있다고 하는데 우리가 당신을 어떻게 관리하겠어요?” 이때부터 그들은 다시 나를 찾지 않았다. 지금까지 공안국장과 몇 차례 만났는데 그때마다 나에게 사과의 뜻을 표하며 이전 일로 그를 원망하지 말아 달라고 했다.
사존과 대법에 대한 확고한 믿음으로 거센 압력과 박해 앞에서도 금강부동(金剛不動)하며, 한 걸음 한 걸음 걸어 지나왔다. 사부님께서 말씀하셨다. “우주진리(宇宙眞理)에 대하여 견고하여 파괴할 수 없는 정념(正念)은 선량한 대법제자의 반석같이 확고한 금강지체(金剛之體)를 구성했으며, 일체 사악의 간담을 서늘케 했고, 방사(放射)해 낸 진리의 빛은 일체 생명의 바르지 못한 사상 요소를 해체했다. 얼마만큼 강한 정념(正念)이 있으면 그만큼 큰 위력이 있다.”[1] “대법제자는 위대하다. 왜냐하면, 당신들이 수련하는 것은 우주의 근본 대법으로 당신들의 정념(正念)으로 대법(大法)을 실증하고, 거대한 난(難) 속에서도 넘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법제자가 정법 하는 것은 역사적으로 선례가 없다. 이지(理智)로 법을 실증하고, 지혜로 진상을 똑바로 알리며, 자비로 홍법(洪法)하고 세상 사람을 구도하는 위대한 장거(壯擧) 중에서, 매 한 사람의 대법제자는 원만의 길을 완벽히 걷고 있다.”[2]
사부님의 제자에 대한 한결같은 자비로운 보호에 감사드립니다!
주:
[1] 리훙쯔(李洪志) 사부님 저작: ‘정진요지2-역시 두세 마디를 말하다’
[2] 리훙쯔 사부님 저작: ‘정진요지2-제자의 위대함’
원문발표: 2021년 9월 16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https://www.minghui.org/mh/articles/2021/9/16/427447.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