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중국 대법제자
[밍후이왕] 1993년 5월부터 8월까지 사존께서 구이저우(貴州)성 구이양(貴陽)시에서 세 번 연속 학습반을 여셨다. 나는 두 번째 학습반에 참가했지만, 마지막 3일밖에 듣지 못했다. 그러나 당시 사존의 설법을 듣고 내 운명은 완전히 바뀌었다.
1. 법을 얻기 전, 삶이 절망에 빠지다
1) 질병의 시달림
법을 얻기 전 몇 년간, 나는 30대 초반인데도 병이 많았다. 부인과 질병이 있어 늘 가려웠고, 눈병에 심장병(심근염)까지, 나는 언제 생명이 위험해질지 몰라 늘 불안했다.
나는 장기간 고도 근시로 눈이 아팠는데, 양방 한방 각종 방법을 써봤지만 치료하지 못했다. 눈 때문에 상하이(上海), 광저우(廣州), 푸젠(福建)까지 갔다가 나중에 구이저우(貴州)에서 민간요법을 하는 의사를 만났는데, 그가 처방해 준 약을 먹으면 눈이 좀 덜 아팠다. 다행이라고 생각했지만 그 약은 계속 먹어야 했고, 제시간에 먹지 않으면 눈이 또 아팠다. 게다가 내성 때문에 갈수록 많이 먹어야 했다. 나는 눈 때문에 정상적인 생활이 어려웠다.
더욱 심각한 것은 심장병이었다. 발작할 때는 심장이 벌렁벌렁하고 숨이 막히고 온몸이 무기력해 금방 죽을 것 같았다. 화창하거나 비 오는 날 또는 화를 내면 심장병이 수시로 발작했는데 증상이 가벼울 때는 우황청심환을 먹으면 완화됐다. 그래서 청심환을 늘 갖고 다니다가 발작하면 바로 복용했다. 그래도 심각할 때는 청심환으로 안 돼서 응급실에 실려 갔다.
1993년 3월, 나는 심장병이 발작해 성(省) 병원에서 응급처치를 받았다. 정신이 혼미한 상태에서 3일간 응급치료를 받은 끝에 살아났다. 10일간 입원하다 병원비를 감당하지 못해 퇴원했다. 우리 집은 5층이었는데 허약한 몸으로 아파트 계단을 오르기란 힘들었다. 계단 난간을 잡고 한 걸음 올라가면 쉬었다 또 오르는 식으로 겨우 올라갔다.
2) 장사하다 큰 손해를 보고 빚을 지다
1980년대 후반부터 나는 한솥밥 먹는 집단생활을 그만두고 옷 장사를 했다. 처음에는 돈이 좀 벌려 비교적 순조로웠다.
나중에 1990년대 초 이삼 년은 옷 소비가 줄면서 수입보다 지출이 많아졌다. 남쪽 해변 도시에서 외상으로 도매해 온 옷이 판매되지 않아 재고만 쌓여 도매상에게 빚을 졌다. 나중에 병 때문에 장사를 멈췄다. 그때 나는 병 상태를 파악해 약을 사고 약을 달여 먹는 것이 일과였는데, 정말 아무 일도 할 수 없었다.
3) 남편과의 불화
나는 남편과 성격 차이, 생각 차이로 자주 작은 일로 싸우면서 양보하지 않았다. 딸이 태어나고 나서 가장 큰 문제는 양육비였다. 장사가 어려워 버는 돈이 없는데 병도 생겨서 돈을 쓰기만 했다. 우리 세 식구는 경찰인 남편이 벌어온 보잘것없는 월급만으로 살아야 했다. 경제적으로 어려워지자 부부싸움은 더 잦고 격렬해졌다. 온갖 말로 서로에게 상처를 주었다.
장사하느라 빚을 진 후 경제적 압력이 더 커지자 남편은 말이 없어지더니 나와 다투지도 않았다. 그는 헤어질 생각을 했다. 나는 직장도 없고 병도 있는데, 이 집은 돈이 있어야 유지할 수 있다(이건 남편 동료에게 들음). 나는 남편이 내 감정은 아랑곳하지 않고 함께 난관을 이겨내려 하지 않는 데서 너무 큰 상처를 받았고, 의기소침해져서 이 상황에서 벗어나고만 싶었다.
나는 조용히 어떤 사찰에 가서 목숨을 끊으려 했는데, 향불 금고를 보고 사찰이 이미 정토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앞길이 보이지 않아 죽음으로 상황을 벗어나 보려 했지만, 천진한 어린 딸이 생각나 결국 그만두었다. 사부님께서 일찍이 내게 대법을 얻게 배치해주시지 않았더라면 몇 번은 죽었을 것이다.
2. 법을 얻을 때 대법의 신기함과 사부님의 자비를 목격하다
1993년 5월 하순, 나는 신문을 보다가 사부님께서 처음으로 구이양(貴陽)에서 학습반을 여신다는 소식을 보게 됐다. 그런데 가서 들으려 했지만, 장소를 찾을 수가 없었다!
6월 초 어느 날 아침, 첸링(黔靈)공원에서 아는 언니를 만났는데, 언니는 나에게 “제1기 학습반은 이미 끝났어. 나도 파룬궁을 수련할 거야.(전에 다른 공법을 배움) 빨리 가! 제2기 학습반도 마지막 3일만 남았어.”
의대 강당에 도착했더니 인파가 가득했다. 나는 뒤에서 21번째 줄에 착석했다. 이때 사람들이 밀려와 강당이 꽉 찼다. 나중에 온 사람들은 통로에 서서 법을 들었다.
강당에 가득 찬 박수 소리와 함께 사부님께서 강단 앞으로 오셨다. 박수 소리가 멈추고 강당은 쥐죽은 듯 고요했다.
사부님께서 설법을 시작하시자 나는 잠이 들었고 설법이 끝나자 잠에서 깼다. 이상한 것은 내가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법을 다 들었다는 것이다. 나중에 ‘전법륜(轉法輪)’을 보고 알게 됐다. 내가 머리에 병이 있었구나. 그렇다. 그때 나는 정신 상태가 아주 좋지 않았는데, 정신이 나갈 것만 같고 흐리멍덩했다. 일을 기억하지 못해 뭘 할 수가 없고 말도 횡설수설했다. 내가 잠자는 상태에서 사부님의 법신께서 내 대뇌를 조절해주셨다. 청각은 문제가 없었기 때문에 한 글자도 빠뜨리지 않고 모두 들었다.
사부님께서 대뇌를 조절해주신 이튿날과 그다음 날, 나는 정력이 넘쳐 사부님의 설법이 마음에 닿았다. 28년이 지난 지금까지 정신 상태가 아주 좋다.
그날 사부님의 설법이 끝난 후 나는 잠에서 깨어났다. 내 근처에 앉은 오륙 세 돼 보이는 여자아이가 천진난만하게 고개를 들어 옆에 앉은 할머니를 치면서 말했다. “강단에 계신 사부님이 아주 아주 큰 부처님으로 보여요. 큰 부처님이 몸에서 빛이 나서 강당 전체가 아주 환해요. 강단, 강당 천장, 강당 전체에 크고 작은 각양각색의 금빛 찬란한 파룬(法輪)이 돌고 있어요.”
여자아이는 천목으로 본 수승하고 아름다운 광경을 서술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교공(教功)이 끝나면 사부님을 뵈러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교공이 끝난 후 나는 강의 문밖에서 옛날 친구를 만났다. 그녀는 나중에 보도원이 됐는데, 당시 사부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나도 사부님을 뵙고 싶어!”라고 말했고, 우리 둘은 함께 서서 기다렸다. 얼마 뒤 사부님께서 강당 문 앞에 나타나셨다. 몇몇 수련생은 에워싸고 ‘전법륜’을 사부님께 드리며 서명을 부탁드렸다.
그들이 떠난 후 나는 재빨리 사부님 앞에 다가갔다. 다들 “리(李) 선생님”이라고 부르길래 나는 처음으로 존칭을 써서 “사부님!”이라고 불렀다. 사부님을 뵙자 마음이 격동돼 “사부님! 오랫동안 기다렸습니다! 사부님께서는 살아계신 부처님이십니다!”라고 말했고, 사부님께서는 미소를 지었다.
그런 후 나와 보도원 수련생은 사부님 뒤를 따라 걸으며 의대 대문을 나섰다. 몇몇 수련생은 사부님과 나란히 서거나 혹은 앞뒤에서 걸으며 앞다투어 질문했다. 사부님께서는 걸어가면서 수련생의 질문에 답해주셨다. 사부님과 몇몇 베이징 수련생은 베이징영화관 길옆 작은 식당에 들어가셨다. 우리는 식당 밖에서 기다렸다.
이튿날 철도5국(鐵五局) 직원이라는 한 50대 여성이 사부님 앞에서 말하는 것을 들었다. “리 선생님, 저를 좀 봐주시지요. 제 손에 ‘흔적’이 하나 있는데, 어떻게 된 것입니까?” 사부님께서는 대답하지 않으시며 그녀에게 설법을 듣고 연공을 배우러 오라고 말씀하셨다.
둘째 날, 셋째 날에는 연공 동작을 배우려고 아침 일찍부터 가서 앞자리에 앉았다. 근시 때문에 안경을 껴도 강단 위에서 베이징 수련생이 연공 시범을 하는 것이 잘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지막 날에 제5장 공법을 배울 때는 가부좌가 되지 않고 다리가 높게 올라왔다. 수인은 더 할 줄 몰랐다. 수련생이 강단에서 연공 동작을 가르치고 사부님께서는 강단 아래로 내려오시어 전체 강당을 다니시면서 동작을 잘하지 못하는 수련생에게 연공 동작을 하나하나 바로 잡아 주셨다. 사부님께서 내게 동작을 가르쳐주실 때 말씀하셨다. “연공할 때 안경을 내려놓으세요.” 그날 이후로 나는 연공하기 전에 먼저 안경을 내려놓는다.
3. 법을 얻은 후 운명이 완전히 바뀌다
1) 대법은 나의 심신을 건강하게, 가정을 화목하게 해 사업이 번창하다
정확히 말하면 나의 운명은 첫날 사존의 학습반에 들어간 그 순간부터 완전히 바뀌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나는 온몸의 병, 생명을 위협한 심장병을 포함해 일 년 내내 가려운 부인병, 눈 통증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그 후로 28년간 나는 병원에 간 적이 없고 약도 먹을 일이 없었다. 질병은 이미 내 몸을 떠났고 나와 인연이 없어졌다.
학습반에 갔던 첫날, 집에 돌아가자 남편은 내가 정신 상태가 좋은 것을 보고는 놀랐다. 남편은 학습반에서 일어난 신기한 일을 듣고는 놀라워했다. 그날부터 28년간 우리 부부는 다투기는커녕 얼굴 붉힌 적도 없다. 남편은 출근하지만, 집안일도 맡아서 하면서 내가 수련하고 장사하는 것을 전력을 다해 도왔다.
내가 수련하면서 나도 남편도 변했다. 법을 얻기 전까지 전혀 없던 일이다. 남편의 동료들도 내가 대법을 수련하는 것을 알게 되었고 나는 그들에게 대법의 진상을 알려줬다. 그들은 나와 남편의 사람됨을 인정하면서 모두 나를 보호해주고자 했다. 나는 수련 환경과 생활 조건이 줄곧 불안정하지 않았다.
심신이 건강해지고 가정이 화목해진 후 한 차례 한 차례 단시간에 심성 고험을 겪으면서 장사가 잘되어 정상 궤도를 회복했다. 장사하면 할수록 경영 상태가 좋았다.
2) 심성 고험(考驗)
옷 장사를 다시 시작 후 광저우(廣州)에 옷을 도매하러 갈 때 심성관은 연달아 왔다. 함께 간 동업자와 공장에 가서 옷을 구매하는데, 분명 내가 주문을 했는데도 다른 사람이 내가 주문한 옷을 빼앗아 가는 것을 보게 됐다. 8명이 방 3개에 거실 하나인 집에 묵었는데, 본래 비좁은 데다 서로들 작은 일도 양보하지 않았다. 이런 환경은 실로 사람마음을 고험했다. 나는 거기에서 참을성을 배웠고 그들과 옳고 그름을 따지지 않고 양보했다. 공용시설을 쓸 때 늘 양보하고, 변기를 뚫어야 할 때는 아무도 하려 하지 않아 내가 했는데, 손으로 직접 변기를 뚫었다. 방 청소와 거실 청소는 거의 내가 먼저 나서서 했다. 문제는 그곳이 너무 번잡해서 법공부와 연공하는 것이 어려웠는데, 특히 연공을 하지 못해 밖에서 장소를 좀 찾아서 연공을 했다.
3) 유암화명(柳暗花明)의 수련 환경
광저우에 머물던 때에 심성관을 지나가자 층차가 올라갔다. 어느 날 속으로 사부님께 말씀드렸다. “사부님, 좋은 환경을 찾아 법공부하고 연공하겠습니다.” 정말로! 사부님께서 젊은 여성 둘을 보내주셨다. 우리 셋은 실내장식을 한 스위트룸에 들어갔는데 거긴 아주 조용했다. 매일 옷 시장에 가서 시장 상황을 파악하는 외에는 방에서 법공부하고 연공했다.
더욱 감동적인 것은 사부님께서 광저우 현지 수련생과 함께하도록 배치해주신 것이다. 내가 임차한 집 위치는 류화(流花)공원과 가까운데 거기에 연공장이 있었다. 나는 아침마다 류화공원에 가서 연공했다. 좀 지나고서는 그들이 함께 법공부하는 팀에 가서 함께 법공부도 했다. 그곳 법공부 장소와 연공장에는 수련생이 수십 명 있었는데, 비행기 조종사, 화가 등 직업이 다양했다. 다들 함께 법공부하고 연공하고, 홍법(洪法)하고 교류했다. 잊을 수 없는 한때였다.
4) 장사가 성황을 이루다
나는 수련인의 표준으로 자신을 요구하고 많은 고생을 했지만, 심성 고험 앞에서 진선인(真·善·忍) 표준에 따라 하자 장사는 정상 궤도에 올랐고 나중에 갈수록 더 잘됐다. 나는 광저우에서 옷을 도매해 성내 각지의 동료 소매상에 유통했다. 당시에는 입고하는 만큼 유통해서 재고가 거의 없었다. 나는 여러 대형 브랜드 의류를 유통했는데, 다른 동업자들은 감히 엄두를 내지 못 하는 일이었다. 당시 내 사업은 우리 시 번화가 최대 도매시장에서 한쪽을 차지해 지명도가 좀 있었다. 물건을 보면 바로 어떻게 해야 할지 아는 정도였고, 결과는 물 만난 고기처럼 예상한 목표에 도달했다.
법을 얻은 후 내 운명은 완전히 역전됐다.
4. 대법은 차 사고에서 딸과 남편을 구했다
1) 사부님께 구원을 청하자 딸이 기사회생하다
1999년 6월 22일, 그날은 중공(중국공산당)이 대법에 대한 박해를 발동하기 1달 전이다. 딸과 남편이 외출했다가 차 사고를 당했다. 병원에 실려 갔는데, 딸은 뇌출혈, 남편은 갈비뼈 두 대가 부러져있었다. 그 소식을 들은 나는 머릿속이 텅 비었다. 수련생과 동료 몇 명과 함께 사고 현장에 도착했더니 사방에 온통 유리 파편이었고 딸의 신발이 있었다. 날씨는 음침하고 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다. 맞은 편 술집에서 뇌신경외과 병원에 이송됐다고 알려줬다. 병원에 도착하자 딸은 막 응급처치를 했는데 입술이 검붉고 발이 차가웠다. 혼수상태였고 미동도 없었다. 이 모습을 보고 함께 간 수련생들은 무릎을 꿇고 사부님께 구해주십사 청을 드렸다.
70대인 가해자 어머니가 내게 무릎을 꿇었다. 나는 노부인을 부축해 일으키고 말했다. “저는 파룬궁을 수련하는 사람입니다. 제게는 사부님이 계세요. 대법 사부님께서 제 딸을 구해주실 것이니 마음 놓으세요.” 그리고 혼수상태인 딸의 귀에 대고 말했다. “딸아! 네가 차 사고를 당한 것은 너의 큰 난인데, 너는 큰 업을 없앤 것이란다. 너는 내 딸이기에 수련하지 않아도 엄마가 수련하는 것을 지지했지. 너는 대법을 인정하고, 엄마는 리훙쯔(李洪志) 사부님의 제자다. 지금 대법 사부님께 너를 구해주십사 부탁드리마!” 내가 합장하고 의념으로 사부님께 구원을 청하자 딸은 바로 검은 피를 한 모금 토했다. 그러자 1분 전만 해도 검붉던 입술 색이 정상으로 돌아왔고, 차가웠던 발도 따뜻해졌다.
2) 매일 법을 읽어주자 딸이 빠르게 회복되다
내가 대법을 수련하기 시작했을 때 딸은 9살이었다. 딸이 수련하지는 않지만 나는 어디 가든 딸을 데리고 다녔고 딸은 대법을 믿는다. 딸이 차에 치이었을 때 나는 확고하게 믿었다. ‘사부님께서 내 딸을 꼭 구해주실 것이고 딸은 반드시 정상으로 회복될 것이다.’
나는 딸에게 ‘전법륜’을 읽어주었다. 정신이 있든 없든 낮이든 밤이든 거듭 법을 읽어주었다. 1달 후 사악의 박해가 시작됐고, 병원 밖의 TV, 방송, 잡지는 거의 24시간 대법을 모함했다. 나는 진지하게 딸에게 대법을 읽어주었다.
병원에서 딸 주변의 환자, 간호사, 의사 등은 딸이 살아날 희망이 없던 데서 나중에 깨어나고, 하루하루 회복되는 기적을 목격하고는 다들 침묵의 방식으로 대법을 수호했다. 딸의 신체 변화를 통해 대법의 진상을 보았기 때문이다.
딸이 병원에 입원한 4개월간 나는 딸에게 줄곧 법을 읽어주었다. 퇴원하는 날 병원에서 퇴원 절차를 밟는데, 부주임이 말했다. “너무 신기합니다. 우리 외할머니는 노홍군(紅軍)인데 심장병에 걸렸습니다. 저도 외할머니를 치료하지 못했어요. 여사님은 파룬궁을 접촉하고 심장병이 나았잖아요. 따님에게 대법 책을 읽어주는 것을 봤습니다. 따님이 이렇게 잘 회복된 것은 그 책을 읽어준 것과 상관없다고 할 수가 없어요. 사실인 것을 알지만 아직 받아들이지는 못하겠네요.” 주임은 말했다. “저의 부친은 군의관이었습니다. 우리 집은 의사 집안이에요. 저는 부인께서 거기서 4개월간 법을 읽으시는 것을 봤어요. 따님이 아주 위험한 부분에 뇌출혈이 왔는데 지금 정상이고 퇴원했지요. 정말로 현대 과학으로 해석할 수 없는 신기한 현상입니다.“
병원 관계자들은 모르겠지만, 딸은 퇴원 후 고등학교 2학년 과정을 다시 다녀서 30점을 웃도는 점수로 좋은 대학에 입학했고, 졸업 후에는 토플이 5점 부족해 해외 유학을 포기했다. 나중에 딸은 나와 함께 장사하다가 자기 회사를 차렸다. 딸은 배우는 것을 좋아해 지금은 홍콩에서 대학원에 다닌다.
나는 딸과 함께 사고를 당한 남편에게도 말했다. “괜찮아요! 지은 업을 없애는 것이라 좋은 일이에요!” 남편에게 작은 카세트를 주고 사부님 설법을 듣게 했다. 남편은 단시간에 건강을 회복했다. 본래 남편은 딸이 대학에 가면 수련하려 했다. 당시 그는 일이 바쁘고 딸이 고2였는데 중공 악당의 박해가 시작됐다.
3) 딸을 간호하며 타인에게 관심을 두다
딸에게 대법 책을 읽어주던 어느 날, 환자의 신음이 들렸다. 청소부가 말했다. “그는 군용차에 치이었는데 당시 두 명이 치었지만 한 명은 즉사하고 그는 병원에 실려 갔어요. 부대에서는 5000위안을 던지고 가버렸는데 가해자를 찾지 못했다네요. 이 사람은 지금까지 식사도 하지 못하는데 돌봐주는 사람도 없답니다.”
나는 청소부에게 말했다. “마침 제가 아침밥을 사놓고 아직 먹지 않았어요. 저 대신 갖다 주실 수 있으세요?” 청소부는 도시락을 받아들더니 “파룬궁을 수련하는 사람은 참 마음씨가 좋네요!”라고 말했다. 그 후로 나는 그가 퇴원할 때까지 매일 그에게 도시락을 갖다 줬다. 남편은 칼국수 등도 갖다 줬다. 주변 사람은 우리 행동을 보고 우리 가족이 마음 씀씀이가 좋아서 복이 있을 것이라며 감동했다. 나중에 딸이 퇴원하고 이 사람도 낫자 병원에서는 돈을 모아 그에게 기차표를 주고 집까지 데려다줬다.
5. 정법(正法) 수련에 참여해 수련생을 도와 난관을 넘다
1) 집을 임차해 진상 자료를 만들다
2000년경 나는 수련생과 한 자료점에 갔다. 그들이 매일 토란만 먹고 있길래 나는 집에 가서 돈을 좀 가져오려 했다. 하지만 그곳이 중공 악당에게 노출돼 자료를 만들지 못한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당시 나는 장사가 조금 나아지는 상황이어서 돈이 필요했지만, 나는 장사에 쓸 돈은 뒤로 미루고 우선 자료점을 위해 집을 빌린 후, 생활용품을 사는 등 모든 준비를 마치고 집에 돌아왔다.
집에 돌아왔을 때 한 수련생을 만났는데, 수련생 3명이 머물 곳이 없고, 현금도 한 푼이 없는 상황이라고 했다. 그들은 장소를 찾아 진상 자료를 만들고자 했다. 나는 이미 준비해놨다며 그 몇 명을 직접 빌린 집에 데려갔다. 수련생 몇 명은 모두 감동했다.
그때 진상 자료는 주로 현수막이었다. 나중에 현수막 수요량이 많아지자 나는 또 대학 근처에 큰 집을 빌리고 생활용품을 갖춰 놨다. 거기서 크고 작은 현수막을 만들어서 기타 필요한 수련생에게 제공했다. 나와 수련생 몇 명은 자주 함께 나가서 현수막을 걸었다.
2) 수련생이 난관을 지나게 돕다
딸은 대학 졸업 후 나와 함께 장사하다가 자체적으로 의류 회사를 차렸다.
한번은 꿈에 사부님께서 딸을 점화해 주셨다. ‘너는 유랑 중인 수련생이 난관을 지나게 도와야 한다.!’ 어떤 수련생은 박해당해 감옥에서 나온 후 일자리를 찾을 수가 없었다. 딸은 그들을 고용하고 수련생을 자기 집에 묵으면서 출근하게 했다. 때로는 한꺼번에 몇 명을 받아들였다. 한 사람은 세뇌반에서 박해를 심하게 받고는 발이 부어 생활을 스스로 처리할 수가 없었다. 딸은 그녀를 먼저 집에 데려왔는데, 그 수련생은 법공부와 연공을 통해 몸이 신속히 바로잡혔고 딸의 회사에 3년간 있으면서 출납을 담당했다.
원문발표: 2021년 8월 17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https://www.minghui.org/mh/articles/2021/8/17/427903.html